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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 현실의 Easton 모형에의 적용


<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중심으로 (1985∼1987) >

1. 당시 전두환 정권의 성격(Political System)      : 국민적 정당성을 결여한 폭력적이고 폐쇄적인 권위주의적 군사 독재 정치체제  

2. 시대적 환경(Environment)

(1) 정치 : 1983년말에서부터 1985년 중반에 이르는 시기는 체제 정비를 마친 권력이 탄압을 일정 정도 완화시켜 이른바 유화 국면이 전개되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학원정책의 변화로 시작된 이러한 유화조치는 5공화국정부의 고육책이자 1980년 이후 3년간의 정치적 경험을 통해 통치능력을 강화한  5공화국이 그에 기반해 나름대로의 정치적 자신감을 근거로 공세적으로 채택한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정치'가 완전히 배제된 지배보다는 '정치'를 병행하며, 궁극적으로 '정치적' 지배로 이행하는 것이 지배세력 전체의 이익에 부합된다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독재권력의 '유화'보다 이를 계기로 복구된 민족 민주 세력의 '강화'가 더 두드러졌던 특징을 보이고 있다. 학생 운동은 강력한 조직적 투쟁을 통하여 독재 권력에 도전했으며, 노동 운동 역시 조직적 연대를 모색하면서 점차 정치투쟁적 성격을 강화시켜 나갔다. 재야 세력도 조직적 통일을 적극 모색하였다. 한편 체제 정비기에 제도권 밖으로 배제되었던 재야 야권은 1984년 5월 '민주화 추진 위원회(민추협)'을 결성하며 점차 정치활동의 여지를 넓혀가다 1985년 2월 12일 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의 이름으로 승리함으로서 일거에 제1야당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2) 경제 :  1980년을 전후해 세계적인 공황의 영향과 불안정한 정치 상황으로 인한 마이너스 성장과 외채의 급증이라는 상황에 등장한 5공화국은 경제 안정화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이러한 자유주의적인 경제안정정책이 외부환경의 변화와 물가안정정책의 성과라는 유리한 조건과 맞아 떨어져, 한국경제가 외형상 경제적 침체에서 벗어나 경기회복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는 집권과정에서의 정당성 결여를 경제적 업적으로 메우려는 전두환 정권의 의지가 성공한 것 처럼 보여 전정권은 정권의 안정화에 어느정도 자신감을 갖기 시작한다. 정치적 유화조치는 어느정도 이러한 정권의 자신감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정권의 경제업적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전정권에 대한 '신뢰' 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3) 사회 : 당시 한국 사회는 정치적 선호를 놓고 국민들 사이의 심각한 분열상태가 표출되고 있었다. 즉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거나 그것을 야당이나 재야보다 선호하려는 국민층과, 그 정권을 반대할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해 강한 적대심 또는 반감을 갖는 국민층 사이의 차이와 구별이 매우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의 정치문화 속에 과거 어느 때에도 볼 수 없었던 폭력에 의해서라도 정권을 퇴진시켜야 한다는 전투적인 정치적 성향이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80년대의 한국사회는 정권을 놓고 찬성과 반대라는 선명한 선호패턴을 나타내는 균열구조를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정권세력과 반대세력이 날카롭게 대립하는 양극화된 불안정한 정치문화로 변해가고 있었다.

3. 진행과정(Input, Output, Feedback)

제 1 기

(1) 투입 : 전두환의 1986. 1. 16 국정연설에서 88년 평화적 정권교체가 끝난후에 개헌논의 시사에 대한 Feedback으로써 청년·학생 및 사회운동단체들은 2월 4일 서울대집회에서 '헌법철폐투쟁대회 및 개헌서명운동 추진본부 결성식'을 갖고 이를 계기로 직선제를 핵심으로 하는 민주헌법쟁취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신민당도 2월 12일 ‘2·12총선 1주년기념식’을 기해 1천만 개헌서명운동을 전격적으로 시작함으로써 민주헌법쟁취투쟁에 가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민우 신민당총재와 양김씨는 난국타개 6개항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1986년 가을 대통령직선제 개헌완료, 87년 가을 대통령선거 실시 등 제도권정치의 복원을 주요내용으로 한 것이었다.(Demand) 여기에서 직선제쟁취라는 당면의 정치적 목표를 같이하는 신민당 등 야권과 민주화운동세력간에 민주대연합이 형성되었다. 1986년 3월부터 신민당은 개헌추진위 각 지부 결성식을 통해 직선제개헌쟁취투쟁을 대중집회의 형식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3월 30일 광주에서 개최된 '개헌추진위 전남지부 결성대회'에 35만 명의 시민이 참가하여 직선제개헌쟁취투쟁의 대중성을 크게 고양시켰으며, 지식인·종교인·교수들의 시국성명 역시 이 시기 직선제개헌의 당위성을 대중적으로 선전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 (Support)

(2) 산출 : 이와 같이 개헌 서명 운동이 장외에서 급속히 확산되자 5공 정권은 임기내 개헌 불가의 당초 입장에서 물러나, 신민당과 재야를 분리시키고 개헌 논의를 정치권 안으로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1986. 4. 30 전두환은 청와대 3당 대표 회동에서 국회가 합의한다면 임기내 개헌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Decision) 그러나 국회내 합의 개헌이 지지부진하자 5공 정권은 여야 합의 개헌보다는 '합의성 합법 개헌', 곧 일부 야권과 결탁하여 다수의 힘으로 의원 내각제 개헌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모색하였다. 그 과정에서 12월 24일 '이민우 구상'이 나왔다. 이민우 구상의 핵심적인 내용은 7개항의 민주화가 선행된다면 내각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1987. 2. 12일 민정당 확대간부회의는 '내각제 합의개헌'을 부동의 당론으로 재확인하였다. (Policies)  

제 2 기   Feedback

(1) 투입 : 이민우 구상이 공론화 되던 1986년 12월 김영삼, 김대중 양 김씨는 대통령 직선제를 고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재야세력과 연합전선을 구축하였다. 그들은 1987년 4월 74명의 국회 의원과 더불어 신민당을 탈당하여 신당창당을 선언하였고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Demand, Support)

(2) 산출 : 국회내 개헌 논의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여당과 재야를 갈라놓는데 성공한 5공 정권은, 그 사이 재야 운동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여 그들의 세력을 꺾어 놓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국민대중과 양 김씨의 이민우 구상에 대한 반대로 내각제 개헌을 통하여 보수대연합적 지배구도를 정착시키려던 의도가 좌절되었으며, 양 김씨와 재야의 거쎈 반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5공 정권은 1987년 4월 13일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하며 헌행 헌법으로 차기 정부를 구성하겠다는 호헌조치를 취하게 된다. (Policies)

제 3 기   Feedback

(1) 투입 : 5공화국이 선택한 무모한 4·13호헌조치에 대한 정치적 반대는 초기에는 광범위한 지식인들의 성명전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대중적으로 강력하게 조직되었다. 4·13분쇄와 직선제쟁취투쟁이 점차 대중적 세를 형성하던 5월 27일 재야와 통일민주당등 80여 명의 각계대표가 모여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발기인대회 및 결성식을 거행하기에 이르렀다. 국민운동본부는 6·10대회를 박종철사건 조작 규탄뿐만 아니라 4·13호헌조치의 철회와 민주개헌쟁취에도 초점을 맞추기로 함으로써 정치국면의 성격을 개헌공방으로 보다 분명히 규정하였다. 국민운동본부의 결성으로 인하여 4·13호헌조치 전 1년여에 이르는 개헌운동과 4·13호헌조치 직후부터 전개된 민주헌법쟁취운동이 결여하고 있던 정치적 구심이 건설됨으로써 민주헌법쟁취운동은 전국적·전국민적 대중정치투쟁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하여 이제 '6월항쟁'이라고 불리우는 범국민적인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Demand, Support)

(2) 산출 : 이 같은 민중들의 대규모 투쟁에 결국 5공화국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6·29 선언'을 통해 일단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수용, 대통령 선거법 개정, 김대중씨 사면 복권 및 극소수를 제외한 시국 관련 사범 석방, 국민 기본권 신장, 언론 자유 창달, 지방 자치제 실시와 대학의 자율화, 정당의 자유로운 활동 보장, 과감한 사회 정화 조치등 8개항을 약속 했다. (Policies)

4. 結

 이상으로 6·29 선언이 나오기 까지의 정치적 과정을 Easton의 체제모형에 적용을 해보았다. 그런데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야당과 민주화 세력들의 요구와 그에 대한 산출로써 도출된 정책을 볼 때, 그러한 요구에 부합하는 정책이라기 보다는 당시 집권세력의 정치체제를 유지시키며 요구를 무마하기 위한 미봉책으로써의 정책이라는 성격이 짙다. 이렇게 볼 때, 산출로써 나타나는 정책이 언제나 투입에 부응하여 결정되는 것이라는 Easton모형은 당시 한국사회를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다.  


본 글은 동아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정치과정론' 강의(1998, 이대규교수님)때 'David Easton 모형의 현실적용'이라는 주제에 대해 94학번 이병권, 김광진 95학번 차선희가 조사하여 발표했던 글입니다.



제2차 세계경제대공황..오일쇼크..1974~1975..


http://kr.blog.yahoo.com/bullview/1238
2008/04/22 오후 3:44 | 공부하자

1974-75년 공황에서 각국의 공업생산 감소율은 1930년대의 세계대공황 이후 가장 컸다. 미국의 공업생산은 1973년 11월-1975년 4월의 17개월 동안 13.8 % 감소했고, 서독은 1973년 12월-1975년 5월의 26개월 동안 12.3 % 감소했으며, 영국은 1973년 10월-1975년 5월의 19개월 동안 11.0 % 감소했고, 일본은 1973년 12월-1975년 2월의 14개월 동안 21.4 % 감소했다.

이 공황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흔히들 오펙(OPEC. 제3세계 주요 석유수출국들의 카르텔)이 1973년 10월-1974년 1월에 석유가격을 배럴당 3달러에서 11.65달러로 4배 인상했기 때문에, 공황이 발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공황의 방아쇠에 관한 이야기다.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면 총알이 폭발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총알을 넣지 않고 아무리 방아쇠를 당겨봐도 폭발은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유가 폭등 이전에 이미 세계경제를 공황에 빠뜨릴 조건들이 성숙하고 있었으며, 유가 폭등은 공황을 촉발했을 따름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1.1970-71년의 경기 후퇴

이윤율의 추이를 살펴보면, 주요 선진국의 기업 전체와 제조업의 이윤율은 대체로 1960대 중반의 최고 수준으로부터 1973년에는 거의 30 %나 저하했다. 미국의 예를 보면, 기업 전체의 이윤율은 1966년에 22.3 %로 최고 수준을 기록했는데 1973년에는 14.8 %로 폭락했고, 제조업의 이윤율도 1966년에 34.9 %로 최고 수준을 기록했지만 1973년에는 22.5 %로 폭락했다. 이윤율이 자본가의 투자능력과 투자의지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이윤율의 폭락은 경제를 침체에 빠뜨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1970-71년의 경기 후퇴가 이것을 가리킨다.

이윤율의 저하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들 때문인데, 첫째로 주요 산업들(예: 섬유산업, 자동차산업, 조선산업, 석유화학공업, 철강업, 가전공업)이 수요 감퇴, 경쟁 격화, 저생산성, 과잉설비 등의 문제점에 부닥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환경오염이나 제품의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높아 가면서 기업들은 수익을 낳지 않는 설비에 투자해야만 했고, 노동자들은 포드주의적 단순반복노동에 대해 무단결근 등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둘째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격화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1968년 5월 혁명 이래 임금수준이 대폭 상승했고, 이탈리아에서는 1969년 가을부터 북부공업지대에서 주변노동자들(이탈리아의 남부와 중부에서 이민온 공장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임금수준이 크게 상승했다. 또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은 사회복지제도의 개선과 확대를 추진했다. 보건과 교육을 위한 지출, 그리고 소득보조(실업자에 대한 실업수당, 퇴직자와 노령자에 대한 노후연금, 저소득층에 대한 각종 보조) 등 사회복지비는 1960-70년에 국내총생산의 증가율보다 더욱 크게 증가했다. 이리하여 사회복지비/국내총생산의 비율은 1970년대 초 프랑스 22.4 %, 서독 22.1 %, 영국 18.2 %, 미국 17.1 %, 일본 9.9 %이었다.

셋째로 국제통화제도가 불안정적이어서 외환투기나 골드러쉬(gold rush. 달러를 금으로 바꾸려는 대소동)가 자주 발생함으로써 국제거래가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60년대 중반 이래 수입초과, 대외원조, 베트남전쟁, 대외투자 등으로 대규모의 달러를 해외로 유출했기 때문에, 세계화폐로서의 달러에 대한 신뢰도(또는 신인도)가 하락하여 달러를 금으로 바꾸려는 대소동이 여러 번 일어났다. 결국 닉슨은 1971년 8월 15일 달러를 금으로 태환하는 제도를 폐기한다고 선언했고, 1973년 3월 모든 나라는 변동환율제를 채택하게 되었다.


2.1972-73년의 투기적 벼락경기

각국 정부는 1970-71년의 경기후퇴를 해소하기 위해 재정금융의 확장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1972년은 미국의 대통령 선거 연도여서 미국 정부는 확장 정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확장 정책 때문에 무역수지가 더욱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독과 일본에게 마르크와 엔의 평가절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서독과 일본은 평가절상이 자국 상품의 국제경쟁력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여 평가절상에 반대하고, 그 대신 무역 흑자로 들어오는 달러와, 환율변동을 노려 들어오는 투기성 자금(hot money)을 빨리 사용해 버리려고 했다. 대내적으로는 공공사업을 미리 집행했고, 금리를 계속 인하하여 투자를 촉진했으며,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투자를 증대시켰고, 대외적으로는 해외투자를 적극 장려했고 원자재를 대규모로 수입하여 비축하게 했던 것이다.


재정금융의 팽창 정책으로 이자율이 낮고 XXX을 손쉽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농산물과 광산물의 원자재 가격이 공급 부족으로 상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1972-73년에는 세계적인 투기 붐이 일어났다. 커피, 설탕, 목재, 알루미늄, 곡물, 금, 골동품의 가격이 폭등했으며, 또한 토지, 건물, 주식에 대한 투기가 대규모로 일어났다. 다시 말해 제조업 등 산업의 확대재생산을 위한 투자가 이윤율의 저하로 정체함에 따라 금융기관의 방대한 여유자금이 원자재, 부동산 그리고 주식의 매입에 대부된 것인데, 매매가 빈번하게 이루어 짐으로써 가격은 급등했다. 일본에서는 1972년 7월-1973년 3월에 목재 가격은 2.24 배, 콩 가격은 4.76 배, 모사 가격은 2.08 배, 생사 가격은 1.94 배, 면사 가격은 1.9 배 폭등했고, 도쿄의 주가지수도 1971년 1월의 148.05에서 1973년 1월에는 422.48로 급상승했으며, 토지 가격도 1970년 3월-1973년 3월에 64 %나 상승했다.

3.1973년 10월-1974년 1월의 유가 폭등

1973년 10월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오펙은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중단시키기 위해 석유수출의 삭감과 국별 수출 금지(예컨대 미국에 대한 수출 금지)를 결정했으며, 석유 가격을 4 배나 인상했다.

유가인상이 1974-75년 공황의 근본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유가인상 때문에 선진국의 구매력이 오펙으로 이전함으로써 선진국에는 유효수요가 부족하게 되어 생산이 격감하고 실업이 격증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사실과 다르다. 물론 오펙이 유가인상을 통해 선진국과 후진국으로부터 대규모의 달러를 흡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달러를 오펙의 금고 속에 넣어 둔 것은 아니었다. 오펙의 각국 정부는 야심적인 개발계획을 세워 선진국으로부터 막대한 규모의 생산재와 소비재를 수입했고, 나머지의 잉여달러는 주로 선진국의 은행에 예금했다. 선진국의 은행은 예금으로 받아들인 석유달러를 주로 발전가능성이 높은 후진국에 XXX함으로써 선진국으로부터 종전과 마찬가지로 생산재와 소비재를 구매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한국 등이 외채위기에 빠진 것도 1970년대 중반 이래 선진국의 은행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석유달러를 차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가인상-->오펙으로 구매력 이전-->선진국의 구매력 부족-->생산의 격감=1974-75년 공황이라는 논리는 옳지 않다.

유가인상이 세계경제에 미친 영향은 다른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유가인상은 석유를 많이 소비하는 산업에 먼저 타격을 가하고 나아가서 경제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석유를 에너지나 원료로 사용하는 산업은 유가인상에 따라 수익성이 크게 악화되었기 때문에 도산하거나 생산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이 산업에 기계나 원자재를 공급하던 산업들도 제품의 판로가 막히자 도산하게 되었다. 둘째로 유가인상으로 인플레이션이 심화함에 따라 각국 정부가 1974년 봄부터 긴축정책을 채택하게 되었고, 이 긴축정책 때문에 모든 투기가 몰락하게 되어 신용공황과 은행공황 및 산업공황이 심화했다.



4.공황의 전개과정

1972-73년의 벼락경기로 원자재, 부동산, 주식의 가격이 폭등하고, 더욱이 유가까지 폭등하여 인플레이션이 급속히 진행했다. 그래서 각국 정부는 1973년 말부터 재정금융의 긴축정책을 실시했다. 석유를 원료나 에너지로 사용하는 산업이 유가인상으로 타격을 받아 경제 전체가 판매 부진과 과잉생산에 빠지고 있는 상황에서 긴축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수많은 투기꾼들이 도산하게 되었으며 이들에게 XXX한 금융기관들도 도산했다.

1974-75년의 공황은 상업, 부동산업, 건설업의 파산에서 시작했다. 또한 석유가격이 폭등하자 자동차 수요가 격감하여 자동차 공업이 타격을 입었으며, 이어서 섬유, 전기기기, 건축자재, 석유화학공업이 타격을 입었다. 철강, 가구공업은 1974년 여름까지는 공급부족 상태이었으나 곧 공급과잉으로 전환했으며, 석탄, 석유, 곡물분야는 상당한 기간 동안 공급부족 상태였다.

각국의 공업생산지수는 크게 감소했지만 인플레이션은 계속 진행했다.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은 196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생산저하율, 생산저하기간, 그리고 인플레이션의 진행속도에서 1974-75년의 공황은 더욱 악화된 형태였다. 왜 이렇게 악화되었는가? 첫째로 1973년 말의 긴축정책으로 다수의 기업이 도산하고 주요 금융기관까지 도산 위기에 빠지자, 정부는 구제금융을 제공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독과점기업들이 석유가격과 원자재가격의 상승을 제품가격에 전가시켰기 때문이다. 셋째로 노동조합은 실질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화폐임금의 인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은 1976-77년부터 상당히 약화되었다. 왜냐하면 완제품과 원자재에 대한 수요가 감소했고, 기업들이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가격인하 경쟁을 시작했으며, 노동조합은 실업 증대로 임금인상을 요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74-75년 공황은 실업을 격증시켰다. 한편으로는 생산이 감소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동절약적인 생산방법을 도입하고 노동조직을 개편했기 때문이다. 또한 1950-73년의 장기번영기에 대규모로 취업한 부녀자, 청소년, 소수인종그룹, 외국노동자들은 쉽게 해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회복지비를 축소하자, 학교나 병원이나 노동부에 고용되어 있던 봉급생활자들이 대규모로 실직했기 때문이다.

<낙수>

광주민중항쟁에서의 민중: people에서 minjung으로, 즉 multitude로의 이행

호헌파와 개헌파와 제헌파: 전두환, 김대중 및 수습위원회, 결사항전파

신화적 폭력과 신성한 폭력: 기술로서의 봉기론의 한계(김창진)

더 약한 폭력개념: 삶정치에 종속되는 방어적, 민주적 폭력

방법론: 제헌권력의 개념

초국적 자본의 출현과 이동: 라틴아메리카와 동아시아

냉전 상황 속의 한반도

미국과 한국-미국의 실용주의

박정희 이후 지역주의, 지역차별의 정치적 함의:

영남의 국민화와 전라의 민중화

제4세계의 창출: 전라도, 여자, 할머니

광주 민중 속에서의 프롤레타리아

제헌권력과 자기부정 혹은 결사항전

제헌권력의 조직형식

집중인가 분산인가? 확산적 네트워크와 집중적 국가화

제헌권력의 군사적 조직형식 문제-시민군, 기동타격대

제헌권력과 의식과 이념문제: 간첩, 공산주의, 민주주의

이른바 지도력의 문제: 노동계급의 주도성이 존재했다. 지도력의 결여가 문제였다.

제헌권력 내부의 균열: 집중, 분산....

전노협 해체와 제헌논리의 억제

전, 노 처벌과정에서의 제헌문제의 희석

80년 광주, 학살자 미국의 정체를 폭로하다
http://www.2010corea.or.kr/travel/time_tour.asp?tm=tm09&mode=t

10.26 사태 이후 사회 각계에서는 유신독재의 잔재를 숙청하고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움직임이 벌어졌고, 그 기운은 날이 갈수록 더욱 확산되어 갔으며 심지어 군부 내에서까지 그에 동조하는 경향이 노골적으로 표면화되었다. 이에 당황한 미국은 겉으로는 한국의 민주와를 지지하는 것처럼 했지만, 실은 그 배후에서 민주세력을 진압할 흉계를 꾸몄다. 12.12 군사 쿠데타나 5.18 광주학살만행도 모두 그 연장선상의 사건들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광주학살 개입 경위
1. 5월 13~14일 광주학살 실전 훈련인 ‘코프 제이드80 Ⅱ’ 한미연합훈련 전개
2. 5월 18일 직전 광주 거주 미국인 전원 철수
3. 5월 18일 계엄군 병력이동 승인
4. 5월 22일 최종진압을 위해 20사단 투입 승인
5. 조기경보기 2대, 항공모함 코럴시호 급파
6. ‘한미간 협의사항, 24일까지 대기’라는 기록, 광주 투입 군대의 작전일지에서 확인
7. 광주학살 후 6월 2일 미 카터 정권의 전두환 지지 천명
8. 8월 7일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 ‘들쥐발언’
광주시민들이 진압군을 물리치고, 광주를 해방시켰던 80년 5월 22일, 미 백악관에서는 모스티 미국무장관, 브라운 미국방장관, 브레진스키 미국대통령 안보담당특별보좌관, 미합참의장, 터너 CIA국장, 크리스토퍼 미국무차관 등 미국의 고위 정책 작성자들의 참석 하에 이른바 ‘광주사태 수습 대책 안에 대한 긴급회의’가 열렸다.

이 날의회의 결정에 따라5월 22일에 위컴은 국군 두 개 사단 출동을 허용했고 전두환의 이른바 친위사단이라고 하는 20사단을 비롯한 대병력과 탱크, 장갑차 등 군장비들을 광주에 급파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서울신문’과 ‘제1라디오’는 미국이 신군부세력에게 “연합군의 지휘 하에 있는 군병력을 사용하도록 허용했다”고 폭로하였으며, 미국신문 ‘저널오브코미스’는 “광주학살작전과 군의 투입을 지지한다”는 미국의 공식입장이 ‘신군부’에 전달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일본에서 발행되는 잡지 ‘통일평론’(1981년 9월호)에 따르면 전두환 자신도 1980년 5월 30일 진행한 기자회견에서 “미국대사는 광주에서의 잔학행위를 한국사회의 안정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을 고무했다”고 미국의 배후조종과 개입관계에 대해 실토하였다.

5월 23일 미국은 항공모함 ‘코럴시’호를 축으로 한 미사일 구축함 두 척과 순양함, 보급함등 7척으로 구성된 기동 타격군을 한국주변 앞바다에 투입하였다. 그리고 미 제7함대 소속 항공모함인 ‘미드웨이호’, 공군정보통제기 ‘e3e’ 두 대를 한국 주변에 급파하였다. 즉, 미국은 신군부가 진압에 실패해 무장항쟁이 전국적으로 번질 경우 주한미군을 직접 동원하려고 항공모함을 파견한 것이었다.

그 뒤로 국민들은 미국이 학살군을 투입하기 위해 부산항에 항공모함을 불러들인 5월 22일을 ‘반미의 날’로 선포하고 1980년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19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등으로 그 투쟁이 이어졌다.

518 광주민중항쟁

교양자료집

최후의 만찬

-윤상원열사 평전 중에서

이것이 지상에서 나누는

최후의 밥일지도 모른다

적의 탱크와 헬기가

포위망을 좁히며 몰려오는 이 밤

굴욕적인 지상에서의 삶에

마지막 굵직한 종지부를 찍자

지상의 마지막 생명을 부어

죽음으로 새겨넣는 혁명의 출발점을

우리 총을 치켜들어 굵직히 찍자

피로에 지친 퀭한 얼굴들

수마에 시달려 시뻘개진 눈동자

숨막히게 아름다운 그 얼굴들로

우리 마지막 지상의 작별을 나누자

두려움에 고동치는 가슴으로

아 우리 죽음을 불사르고 싸우자

반란의 불꽃되어 파쇼를 불사르자

동지여 숟가락을 들어라

지상의 마지막 밥을 먹어야 한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사람들

허기지고 쓰라린 민중의 위장으로

처절하게 타오르는 민주의 허기로

목숨을 주고 민중권력을 먹어야 한다

이제 잠시 후 조명탄이 오르면

너와 나의 시체를 넘고 넘어

민중의 피바다를 철벅이면서

우리들의 새벽은 올 것이다

살아 동터오는 저 푸르른 새벽

피투성이로 밝아오는 민중의 나라

그 처절한 갈망의 새벽은 올 것이다

자 총을 들어라

총을 들어 학살의 밤을 찢어야 한다

지상 위의 마지막 밥

영원한 생명의 밥

미치게 허기진 민중의 위장으로

우리 최후의 만찬을 나누자

마지막 지상의 밥을 나누자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우리들

목숨을 주고 민중권력을 먹기 위하여

허기진 밤을 찢는 결사항전을 위하여

여는시 - 최후의 만찬

목차

광주민중항장의 현재적 의의

국가와 폭력

518 투쟁의 배경과 전개

518 투쟁일지

5월 광주는 오래 지속된다

광주민중항쟁의 현재적 의의

80년 518은 죽어버린 역사가 아닌 살아숨쉬는 역사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과거를 반추하고 오늘에 이어가야 할 것들을 소중히 감싸안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518이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되고 곳곳에서 관변행사가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죽어버린 역사를 기념하는 것이지 518의 정신을 되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518 핏빛광주의 기억은 김대중 스스로가 자신에게 투영하였습니다.

그러나 광주는 김대중의 것이 아닙니다.

민주화 과정에서 김대중이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은 사실이지만, 김대중 자신 말고도 죽어간 사람은 너무나 많습니다.

또한 그들이 바랬던 우리 사회의 모습은 지금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김대중 정권 마지막 해. 대통령 비리 사건은 그가 과거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끝을 장식하게 될 가능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김대중 정권 5년의 기간동안 파탄나버린 이 땅 노동자·민중의 삶입니다.

80년 광주는 그렇게 살아나야 합니다.

김대중 정권의 총체적 평가와 함께 광주는 넘어서야 합니다.

전노를 쉽게 용서하면 된다는 아집과 독선을 가진 김대중 정권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강행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5년이 지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더욱 큰 투쟁의 당위성 밖에 없습니다.

518의 현재적 의의는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입니다.

광주, 과거가 아닌 현재로

80년 광주는 한국 학생운동에 '민중 지향성'이라는 전통을 형성시켰다. 민중이 죽어가고 있는데 아무 것도 하지 못했던 광주에 대한 한국 학생운동의 빚은 이후에 학생운동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커다란 자산이 되었다. 그리고,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광주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80년대의 광주는 민주화 투쟁의 성지였으며, 조국통일 투쟁의 성지였다.

90년대를 경과하면서 2000년대로 들어오면서 한국 사회에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김영삼 정권을 거쳐 김대중 정권으로 오면서 형식적 민주주의 구조가 어느 정도 완결되고, 민주/반민주라는 대립구도는 더 이상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대립 구도가 되지 못했다. 한국 사회의 태동과 함께 일어났던 계급 대립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완성과 더불어 보다 은폐되었으나, 또한 보다 노골적인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이제,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주된 대립 전선이 되었으며, 한국 사회의 민주화가 아닌, 보편적 인간해방이라는 보다 큰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는 80년대 광주로부터 시작된 하나의 거대한 순환의 마감이라고 할 수 있다. 80년대 투쟁의 가장 큰 수혜자였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서 노동에 대한 착취의 최선두에 서게 되었고, 615 남북공동선언과 함께 80년대 통일 투쟁의 선두에 섰던 전대협-한총련은 이제 정권과의 연대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세력으로 변모했다. 민주/반민주라는 대립 전선의 해체는 한국 정치 지형에 있어서도, 한국 운동 진영에 있어서도 거대한 변화를 야기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 변혁 운동의 종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민주화 투쟁 속에 큰 동력이 되었던 노동자 계급은 파쇼 정권을 향했던 칼날을 이제 그 본질인 자본 그 자체로 돌리기 시작했으며,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전선을 형성했다. 민주 사회를 향했던 꿈은 노동해방의 꿈으로, 보편적 인간해방의 꿈으로, 꼬뮨의 꿈으로 변모되기 시작했으며, 2000년대 한국 민중운동의 새로운 전망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80년 광주 혁명의 기억은 이제 종결된 하나의 순환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순환을 시작하고자 하는 투쟁의 방향을 표상하는 것이다. 민주화 투쟁을 통해서, 통일이라는 화두를 통해서,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을 통해서 파쇼 정권과 미제를 향했던 화살은 이제 민중 그 스스로의 가능성에 대한 긍정의 어법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빛고을 광주는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이 아니라, 80년 광주 혁명을 가능케 했던 바로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광주로, 무장한 군대에 대항했던 민중들의 자치적인 질서, 꼬뮨으로서의 광주에 대한 긍정으로 보편적 인간해방의 가능성을 긍정해야 하며, 이제 그 현실적인 대립물이 되고 있는 자본과 폭력의 사회질서 전반에 대한 투쟁으로, 또한 그 담지자인 김대중 정권에 대한 투쟁으로 외화 되어야 한다.

#1 광주의 피는 민중의 권력을 예비한다.

80년 광주에서의 피의 대가를 통해 아로새겼던 그 실천의 약속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

80년 5월 광주에서 무수하게 죽어야 민중들의 넋들은 이후 민중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신념으로 자리 잡았다. 엄혹한 시절 입으로 입으로 전해졌던 광주의 진실은 모든 운동권에게 공통적인 부채감으로 남게 되었다. ‘내가 도청에 있었다면...’하는 자신에 대한 물음 혹은 ‘민중의 부름에 바로 그 자리에 있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은 응어리가 되어 각자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누구나 자신의 머리 위에 오월 광주를 이고 있다’고 할 정도로 오월의 광주는 자괴감과 부채감 그리고 투쟁의 원동력이 되었다.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졌던 군부독재는 지속되었고, 철옹성 같았던 파쇼권력에 대항하여 광주에서 그러했듯 똑같이 수많은 열사들은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며 독재와 싸웠다. 그렇게 오월광주는 원혼처럼 수많은 사람들에게 붙어서 투쟁으로, 투쟁으로 나서게 했다. 종결될 것만 같았던 광주의 역사는 95년 ‘전·노학살자 처벌, 5·18 특별법 제정투쟁’으로 되살아난다. 미완의 역사로 망각의 강을 흘러 내려가던 광주는 오월광주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현실로 끌어올려졌다. 결국 특별법 제정으로 인해 전·노 학살자는 구속되었다. 그러나 98년 김대중 정권은 동서화합과 포용의 정치를 이야기하며 전·노를 석방했다. 김영삼 시절보다 더 많은 수의 양심수들이 김대중 정권 하에서 구속되었지만 학살자 전·노는 유유히 교도소를 빠져나갔다. 광주민중항쟁에서 무수히 쓰러져 갔던 열사들의 진상규명이 아직도 되지 않은 현실 속에서도 학살의 주범들은 살아났다. 2000년에 광주 망월동 묘역이 국민묘역으로 재단장이 되었으며, 2001년 4월 국회에서는 5·18 희생자들을 일차 대상자로 민주화 유공자를 선정하여 유족들을 우대하는 법을 상정하기도 했다. 이미 학살자 전·노가 구속되고 무기징역을 받고 광주민중항쟁이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인정받는다는 사실들만으로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광주는 잊혀지는 것인가.

그러나 우리에게 여전히 광주는 계속되고 있다. 전·노의 구속이 원한에 대한 한풀이가 아니며, 죽은자가 살아오는 것도 아닌 바에야 더구나 민중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광주의 정신이 현실에서 구현되지 않는 한 광주는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살아있는 현재진행형의 역사로서 광주민중항쟁이기 위해서는 우리가 놓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광주민중항쟁의 원동력, 그리고 항쟁의 주체적 특성, 전개 상황에서 도출되는 평가와 한계가 그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오늘에 살려야 할 것은 비록 짧은 순간이긴 하지만 광주민중들이 목숨을 걸고 쟁취하였던 민중권력이며, 민중권력을 향한 투쟁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이다. 그리고 민중권력을 향해 나아갔던 광주 전사들의 불멸의 투쟁 혼일 것이다. 무기반납 등의 동요가 판을 칠 때에도 꿋꿋하게 도청을 지키던 전사들의 모습은 혼이 되어 오늘에 되살려져야 한다. 그리하여 민중지향성과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투쟁해야 할 것이다.

누구나 외치는 ‘민중권력 쟁취’의 구호는 이제 실천속의 전략으로, 2002년 대선에서의 가장 강위력한 실천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이 자리에 22주년 광주민중항쟁의 혁명기념일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광주의 피의 댓가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김대중에게 그러했듯 또다른 자본권력에 빗대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노력속에서 민중의 원혼은 풀어질 수 없음을, ‘혁명적 정세’를 ‘대기’하며 무기력한 실천속에 자신을 가라앉히는 것으로 민중권력은 현실화 될수 없음을 우리는 잘알고 있다.

민중권력 쟁취! 그를 향한 단일한 실천을 우리는 준비한다.

광주의 피는 민중 의 권력을 예비한다.

#2 역사는 또 한번 되풀이 된다, 지금 이순간 평화를 실현하라!

국가적 폭력.

군대는 대개 전쟁을 치르기 위해, 혹은 전쟁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유지된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과연 전쟁이 없어진다면 군대도 없어질까? 국가는, 아마도 전쟁이 없더라도 군대를 유지할 것이다. 군대가 없으면 무엇으로 국민을 통제할 것인가. 육체적 지배는 가장 원초적 형태의 지배이므로, 군대를 통한 권력이야말로 그것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인 것이다. 이런 본원적인 의미의 국가적 통제를 논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광주의 역사 속에서 노동자 민중의 대한 학살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518 당시 계엄군으로 파견되었던 군인들은 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사격을 했던 것일까.

역사를 소급해서 고민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기는 하지만, 당시 그들의 입장을 고민해보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점이 많을 것이다. 실제 아직도 80년 광주에 진입했던 계엄군은 아직도 역사적 부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20대에 군대에 끌려가서 자신의 가족과 같은 사람들에 대한 무차별 폭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근거는 국가와 군대라는 체계를 떠나서 생각할 수는 없다. 국가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폭력, 그것도 군대에 의한 폭력은 단지 서로의 대치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군대에서 통해 생산되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와 반공사상 그리고 상명하달의 군대식 문화는 개별의 인간을 국가장치로 환원시킴과 동시에 폭력에 대한 죄책감을 무마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는 무수한 국가적 폭력의 가장 핵심적인 예이며, 민중의 투쟁을 가로막기위한 가장 효율적 무기이다.

80년 광주에서는 그렇게 민중은 피를 흘려야 했으며, 개인의 인권은 무참히 짓밟혀갔다.

그러나 우리가 쟁취할 평화는 비폭력주의와 등치될 수는 없다.

80년 광주에서, 파쇼 권력의 무자비한 만행에 대한 자위의 수단으로 들었던 무기는 민중항쟁이 완전히 진압되는 순간까지 지속되고 번번이 무장해제의 위협에 시달리지만 목표로 하는 바를 달성하기 전에는 무기를 놓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게 된다. 이는 결국 무장을 지속하는 것과 무장해제와 반납하의 문제가 곧 투쟁에 있어서 타협적 지도부와 혁명적 지도부의 차이로 귀결되며 오월광주에서는 혁명적 지도부인 ‘민주시민투쟁위원회’가 타협적 지도부인 ‘수습대책위원회’를 대신하게 된다.

평화는 스스로를 무장해체시키는 것은 아니다. 변혁을 위한 투쟁은 그 어느 순간 국가적 통제와 반역에 맞서야 하며, 이에 맞서 싸우는 위한 모든 방식을 예비해야한다.

국가적 통제와 폭력을 무력화시키는 것 역시 우리의 과제여야 한다. 민중의 삶을 위협하는 모든 통제장치에 대한 투쟁은 변혁에 있어 우리가 거쳐야할 하나의 과정이다. 개인의 존엄과 인격을 국가 수호의 대전제아래 하나의 도구로 환원시키는 현재에 맞선 투쟁은 광주의 역사적 교훈을 이어가는 또다른 현재진행형의 싸움이다.

민중에게 평화를! 민중에게 권력을!

80년 광주의 함성은 투쟁하는 자의 귓가에 메아리친다. 80년대와 90년대 선배들이 그러했듯 우리도 제각각 머리에 80년 오월광주를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한다. 반동의 역사에 맞서 거리로 나서야 한다. 민중에게 평화를! 민중에게 권력을!

열사의 삶이 산자의 투쟁으로 오늘에 되살아나듯, 오월광주에서 흘린 민중들의 피는 오늘날 투쟁하는 우리들의 가슴에서 다시 붉게 흐를 것이다. 오월광주의 '불멸의 투쟁혼'은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부른다. 오월. 항쟁의 그 거리에서 다시금 ‘민중의 세상’을 선언하라!

군대는 과연 국민과 나라의 수호를 위해 존재하는가

-국가폭력에 대하여

군대는 일정한 지휘 계통에 의하여 조직된 군인들의 집단이다. 군대의 행위는 모두 ‘일정한 지휘계통’에 따라 이루어지며 정확히 통제되고 운영되는 것이 체계적이다. 518 당시 계엄하 국내 상황은 내전으로 다루어졌으며, 모든 민간인의 행동은 감시되고 잠재적 적으로 규정되었다. ‘모든’ 민간인이라 하는 이유는 당시 광주를 비롯한 전국의 희생자의 연령, 성별, 직업 등의 구성이 실제 다양한 사회전반의 구성원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기에, 행해진 내전은 군대와 국민간의 대결양상이었다. 518은 당시 체제, 투쟁주체, 계급의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하기 이전에 전 민중에게 가해진 전쟁폭력이었다. 전쟁은 어떤 집단과 집단사이에서 무력을 사용하여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공권력으로, 무력으로 무장하고 훈련된 군대라는 집단과 민간인으로 표현되는 민중과의 싸움은 그 물질적 한계가 분명했다. 군대는 한국근대사에서 실질적으로 이렇게 기능해왔다.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는 입대한후 제일먼저 배우는 이 대표적 군가에서 노래되는 사회수호의 역할, 그것을 강조하는 군대의 존재근거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글에서는 사회를 무력에서 무력으로 지키고자 하는 군대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기능을 근거로 군대, 그리고 국가폭력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80년 5월, 군대에는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고, 부패 독재 정권에 반대하던 민중들은 그야말로 총칼에 꺾일 수 밖에 없었다. 무력의 차이는 상당했으며,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살인을 비롯한 탄압―임산부와 아이, 노인 등의 사람을 향한 공격, 지나가는 버스, 트럭 등 차에 대한 공격 등 아무것도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인 공격이 자행되었다. 광주는 무기를 탈취하고 결사항전으로 맞서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도청을 걸고 진행된 싸움에 대한 이야기는 5월 핏빛광주의 절정으로 자리잡고 있다.

광주는 군대가 투입되면서 완전한 전시상황으로 바뀌었고, 투쟁의 양상은 독재타도를 향해 모든 사람이 반파시스트 전선으로 결집하는 것으로 적과 아군이 규정되었다. 군사 쿠데타를 가능하게 한 것은 철저하게 통제되어 운영되는 군사무력을 획득했던 최고사령부였으며, 그것이 이후 군사독재를 유지가능하게 했다. 군대는 개인의 의사가 결집한 것이 아닌, 최고사령부의 결정대로 움직이는 하나의 유기체였다. 하나의 사고와 하나의 행동반경과 행동양식은 이것이 민중 하나하나의 자율적인 결사체와 강제적으로 구성된 하나의 집합체의 전쟁이 가능하게 했다. 탄압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향해 모든 군대의 구성원들이 움직였던 것이다. 이러한 군대에 개인에 대한 원한과 인간에 대한 인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군대는 그 자신의 성격과 물리적 힘을 그대로 지닌채 일상사회에 투입되었고, 외부의 적을 위해 존재했던 군대가 내부에서 적을 찾아내고 기능하기 시작했다.

군대는 적어도 같은 조건을 가진, 또는 같은 목적과 성격을 지닌 적을 이기기 위해 훈련받는 존재이다. 이 군대가 일상사회에서 접했을 80년의 적은 민간인이었고, 무장하지 않았다. 진압은 더욱 쉬웠을 것이며, 무력을 막아내고 응사할 무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분노한 수많은 민중들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승패는 적을 없애는 것으로 갈린다. 군대에서의 개인도, 사회에서의 개인들도 이러한 전쟁상황이 조장된 것에 무력했다. 싸움은 불가항력이었고 군대와의 맞섬은 국가체제와 국가폭력에 대한 투쟁이었다. 군대는 독재체제의 표상이었고 현실체였다. 군인에게도, 민중에게도 삶이 폭력적으로 변화될 것이 강요되었던 것이다. 전쟁에 사람은 없고, 다만 명분과 이데올로기가 기득권을 위해 존재했다. 여기서 이에 대응하는 민중의 질서는 무력에 굴복하지 않고 대당한 무력을 만들어내기 위한 투쟁 역시 진행해야 했다.

국가 폭력이란 개인에게 불가항력으로 가해지는 가공할만한 힘이다. 항상 이데올로기와 함께 가해지며, 교묘하게 사회체제를 유지시키는 기능을 한다. 공권력―공공의 힘이라는 한자를 쓰지만, 이것은 기득권에게 소유되어 있다. 공권력은 그 의미상 공공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다수의 권력이기에 무력사용이 합법적으로 용인되어 있다. 국가라는 애매한 상을 위해 개인의 자유가 박탈되는 것이기에 이 공간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보상이 따른다. 군인의 잘못에 대한 은폐, 전쟁 시 항상 존재해왔던 여성에 대한 가공할 폭력인 위안부의 합법적 설치, 군대를 보호하기 위한 개인의 희생 등은 영화의 소재로까지 자주 쓰이고 위험을 무릅쓰고 폭로될 만큼 누구나 알고 있지만 묵인하는 이야기들이다. 노근리 사건 등 민간인이 살해된 사건이 무마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군대 자체가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므로, 군대에 대한 위협은 사회체제에 대한 위협이다. 더불어 전쟁상황을 정당화하지 못하면, 또는 전쟁위협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군대의 존립근거는 둘 곳을 잃고 위태로워 질 것이다.

우리나라 군대는 나라, 민족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가장 중요하게 만든 이데올로기는 부모 형제(여기서 잠깐― 꼭 형제다. 절대 남매, 자매 등 여성을 포함하지 않는다. 군대(특히 징병제로 유지되는)는 남성성을 강조하는 문화를 만들어놓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를 지키기 위함이다. 그러나 80년 광주에서는 수많은 부모 형제가 죽어갔다. 또한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518의 참상이 존재할 것이다. 518 당시 군대의 적은 민중이었기에 모든 참상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당연히 군은 518 자료를 숨겼고, 시기적절하게 하나의 문건 씩 폭로되는 경우가 존재하면서, 광주의 사실은 조금씩 복원되는 과정을 거쳐 지금까지 왔다. 어찌 군 스스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임무를 가진 군대가 무차별로 국민의 생명을 빼앗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군을 움직일 수 있는 것 자체가 기득권의 근거인데, 군대의 부도덕성을 드러낼 수는 없지 않은가. 현재 역시 군은 성역이지 않던가.

당시에는 김대중의 석방이라는 구호가 하나의 중요한 민중의 요구였다. 김대중은 민주주의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러한 김대중이 수반이 된 정권은 그 어떠한 정권도 하지 못했던 적극적인 경제회복을 위시로 한 자본의 이해에 충실한 정책들을 합법화해놓았다. 민중의 요구와 등치되었던 민주주의의 표상이 대통령이 된 결과이다. 또한 정권은 단지 최루가스만이 없었을 뿐, 엄청난 물리력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민중운동진영의 중심격인물에 대한 직접 탄압 등 가공할 만한 민중운동탄압의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로써 민주주의 투쟁이라는 하나의 순환이 마감하였다. 민주주의는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민중의 생존권은 민주주의로 쟁취되는 것이 아니었다. 핏빛광주는 민주주의의 허상이 다시 한바퀴를 돌았던 것처럼 다시 현재에, 제자리에 있다.

이렇게 자행되고 있는 엄청난 국가폭력은 여전히 80년 광주의 상황의 재연이 가능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민중운동진영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탄압, 검찰과 경찰의 구속, 되살아난 최루가스와 고무총의 위협은 국가폭력이 개인에게 어느정도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형태로 드러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국가는 폭력적으로 정리해고제를 도입하여 생존의 권리를 빼앗고 이제 항의할 통로마저 틀어막고 있다.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여 사회를 유지하는 징병제는 개인의 양심을 억압하며 사람을 죽일 총을 들라고 강요하고 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사회를 유지시키는 이러한 징병제를 거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합법적으로 기능하는 국가폭력은 모든 개인에 대한 탄압 방식을 다양하게 대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무는 있되 권리는 없다. 이용될 수는 있되 주장할 수는 없다. 국가폭력은 물리적인 방식으로 보완되어 있기에 함부로 항의할 수도 없다. 군대는 이러한 사회적 모순이 첨예하게 드러날 수 밖에 없지만 폭력적으로 억압되어 있는 하나의 사회억압체제이며, 이러한 군대가 존재하기에 핏빛 광주는 항상 우리곁에 있다.

518 배경 및 전개

1.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배경

● 한국 자본주의와 지역적 불균형 발전

50-60년대 원조 경제를 거치면서 형성되어 온 한국 자본주의는 70년대 접어들면서 대외지향적인 경제 개발 계획에 의해 더욱 강력한 국가 독점 자본주의 체제로 확립되었고, 중화학공업을 필두로 한 독점재벌의 지배력이 절대화되었다. 공업단지와 대자본의 집중도는 서울,경기ㅡ경남북으로 이어지는 남동임해공업단지에 집중되었으며, 이는 일본과의 국제분업연관 속에서 가속화된 측면도 있었지만, 지배권력의 정당성 및 지지기반 확보, 지역적 불균등 발전에 의한 분할 통치를 수월하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대자본의 투자가 집중된 지역에서는 비독점, 중소자본이 독점자본과 경쟁에 의하여 분해/몰락되면서도 하청계열화를 통해 존속할 수 있고 새로이 형성되는 도시의 소비시장 참여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대자본이 거의 투자되지 않은 전남북 지방 등은 독점-비독점 자본의 축적 또한 매우 미미했다. 이 지역의 중소자본은 농촌과 중소도시의 국지적 시장에 의존했었는데, 고속도로 등과 같은 교통망의 확대와 운송수단의 발달로 독점자본이 형성하는 전국적인 시장망에 의해 해체되어 그 기반이 매우 위축되었다. 상대적인 산업화의 정체현상, 불균등 발전은 고용 구조의 왜곡을 초래한다. 즉, 지속적인 저곡가, 저임금, 농산물개방은 탈노화된 노동력의 고용기회를 박탈하는 한편 실업자 등 광범위한 노동력 풀(pool)을 도시 주변에 형성하게 되고, 이는 일자리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다른 도시로 이주하게끔 압박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 항쟁 주체

일반적으로 60-70년대 한국자본주의는 독점자본의 지배력 강화, 중소자본의 몰락, 하청계열화, 농민층의 분해를 동반한 자본-임노동 관계의 확대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광주-호남지역의 자본축적이 미비했던 관계로 대규모로 조직된 노동자계급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항쟁 당시 사망자, 부상자, 구속자 등의 면모를 볼 때, 이들 노동자들이 대체로 양화공, 보일러공, 미장공, 식당종업원등의 신분이었다. 농민들은 저곡가, 농정개방화로 인해 직접적인 생존의 위협에 부딪혔으며 저임금 노동자가 되거나 도시빈민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중소 자본가들은 타지역의 독점자본과의 경쟁에서 밀려나고 지배권력의 국가독점정책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초기 항쟁의 주체는 내외 독점 자본의 수탈 대상인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도시 쁘띠부르주아지 및 중간 계층, 중소 부르주아지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계엄군의 살상에 자연발생적인 투쟁대오를 형성하고, 부르주아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어깨를 함께 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이념을 갖지 못한 당시 민중운동의 역량과 김대중이라는 반군부 자유주의 정치인의 폭발적인 영향력을 고려할 때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비독점 중소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가 관철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26일 이후 반파시스트 전선은 대중정치 투쟁이 무장투쟁으로 전환한 후 지도력 확보에 고심하던 진보적 지식인, 운동가그룹,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도시 쁘띠, 학생 등으로 형성되며 이 ‘진정한 민중 블록’은 비타협적인 최후의 도청 사수 투쟁을 수행하게 된다.

● 지역의식과 김대중

각 부문에서 세도를 누리며, ‘반전라도 감정’을 구조화시킨 ‘경상도 권력=파시스트 권력’의 타도라는 정치적 지향으로 발전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호남 민중들이 처한 부당한 현실을 한국 사회의 보편적인 모순의 집중된 표현으로 인식하고 이들의 요구를 안아서 주장할 <대안>으로서의 진보세력이 극히 미미한 상황에서, 오랜동안 파시스트 권력으로부터 탄압받으며 투쟁해온 동향 출신인 한 자유주의 정치인의 집권과 결부시킬 때, 이 지역 연대감이 강력한 반파시즘 정치의식으로 표현되는 것은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파시스트들과 전투적 민중이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광범위한 민중 연합블록을 추동하던 지역연대감은 더 이상 투쟁 전선에서 자신의 역할을 해낼 수 없었다.

2. 항쟁의 발발과 무장 투쟁

● 서울의 봄 이후

10.26 사태 이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