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financial rent를 '금융렌트'라고 번역하기보다 '금융지대'라고 번역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나는 땅 '地' 자의 구성으로 설명하곤 했다. 오늘날의 땅은 흙으로 구성된 것만이 아니라 언어로 구성되었다고 하면서.  땅의 언어학적 전환과 그것의 물리적 대지와의 연속성을 설명할 방법이 쉽지 않았다. 오늘 배달된 『수유 위클리』 7호에  실린 고병권  편집자의 글의 일절이 그래서 인상적이고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번호 제게 큰 감동과 가르침을 준 <전선인터뷰>의 주인공 성태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언젠가 아이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세우고 자기 이야기를 만들고 싶을 때 그때 아이들에게는 자기 낱말들이 필요해요.” 성선생님이 생각을 전하는 수단으로 ‘낱말들’을 말씀하신 건 아닌 것 같아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낱말’은 생각이 자라나는 ‘토양’이랄까 ‘바탕’ 같은 것이죠. 땅에 마디마디 심는 고구마순처럼, 우리 몸과 맘속에 던져진 낱말들에서 생각들이 자라나는 것 같아요. 살다가 어떤 일을 겪을 때 있죠, 그때의 외부 충격이 우리 내면의 낱말들로 하여금 생각의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고 덩굴을 이루게 하는 거겠죠.1


낱말들이 생각의 토양으로 간주되는 것 같기도 하고, 생각의 씨앗으로 간주되는 것 같기도 하다. '언어는 생각의 토양이고 낱말은 생각의 씨앗이다'라고 말한다면 혼란은 다소 정리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토지와 언어, 종자와 낱말을 연결짓는 이러한 생각은 금융의 이자나 수수료를 지대와 연결시키는 것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같다. 오늘날 금융지대는 낱말과 언어에 대한 사적 소유의 독점(지적재산권을 생각해 보자)를 통해 언어적 공통체를 착취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의 독점을 통해 토지 위에서 이루어지는 노동활동을 착취했던 토지지대와 같은데,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지대 자체의 변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1. http://suyunomo.net/?p=1438 [Back]
2010/03/13 10:27 2010/03/13 10:27
※이 글은, 오는 3월 19일 오후 3시 광주 NGO 센터에서 있을 5.18 30주년행사위원회 주최 토론회에서 발표할 집필중인 글의 서문(초고)이며 각주는 제외했다. 이 글은 조정환, 「광주민중항쟁과 제헌권력」, 『5.18 민중항쟁에 대한 새로운 성찰적 시선』, 한울, 2009, 273~307쪽의 후속편에 해당되기도 한다.- 아멜라노


5월 담론의 제헌적 재구성을 위하여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경쟁적 협력을 넘는 다중의 글로벌 코뮤니즘-

조정환

1. 머리말

30년 전 5월 25일부터 27일 사이에 시민학생투쟁위원회의 제헌권력은 전두환 호헌파의 학살적 계엄통치에 무장으로 맞섰을 뿐만 아니라 계엄군의 ‘과잉진압’ 중단과 시민군의 무기반납을 교환하려 했던 수습위원회의 개헌정치도 거부했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외무부와 내무부, 그리고 시민군을 갖춘 엄연한 자치권력으로서, 비록 미분화된 형태로지만 입법과 사법의 기능까지 통일적으로 수행했다. 개헌파가 대오에서 이탈한 가운데, 1980년 5월 27일 새벽,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계엄군의 투항요구를 거부하면서 죽음으로 항쟁의 제헌적 생명력을 살려냈다. 고전적 비극은 단지 비참한 죽음을 보여주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통해, 그리고 죽음을 넘어 지속되는 삶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광주민중항쟁이야말로 역사 속에 등장한 비극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피의 결사항전 사흘 후인 5월 30일, 정부의 만행에 항의하여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뿌린 뒤 서강대학교 기독교 회관 옥상에서 투신한 김의기의 죽음, 「광주시민의 넋을 위로하며」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그해 6월 9일 이대 앞 네거리에서 “유신잔당 물러가라!”, “노동삼권 보장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를 외치면서 자신의 몸을 불사른 노동자 김종태의 죽음, 그리고 항쟁 당시 시민군으로 참여하여 총상을 당한 바 있으며 노동자로 생활하다가 1985년 8월 15일 전남 도청앞 금남로 1가에서 진상규명을 미루는 정권에 항의하여 전단「8.15를 맞이하는 뜨거움의 무등산이여!」를 뿌리면서 분신한 홍기일의 죽음 등은 제헌권력이 어떻게 그 비극적 생을 이어가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1980년 5월에 뚜렷이 현시되었던 제헌적 힘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가? 정확히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물음 앞에서 주저하지 않을 수 없다. 1980년 5월 항쟁이 1987년 6~9월의 항쟁으로 부활했으면서도 광주보상법(1990)과 5.18특별법(1995)을 거치면서, 그리고 호헌파로부터 이른바 ‘광주내란주모자’로 지목되었던 김대중의 집권기를 경유하면서 그것이 개헌파의 권력제도 속으로 포섭되어간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전두환 노태우가 처벌되었고 항쟁 참가자들은 보상을 받고 국가유공자로 인정되었으며 5.18은 기념일로 제정되었지만 이것이 항쟁의 희극적 반복이자 조작된 결산에 불과했다는 비판적 평가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폭넓은 공감을 얻어가고 있다.

우리가 이 과정을 문제로 느낀다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잠재력이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필요한 것은 5.18을 국가발전의 에너지가 아니라 다중의 삶정치적 해방과 제헌적 자유자치의 동력으로 재정립하는 것이다. 제헌권력이 개헌파의 이 포섭을 뚫고나와 역사적 구성역능으로서 그것의 활력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지난 30여년의 역사에서 개헌파가 어떻게 집권할 수 있었는지, 무엇이 그것의 제정된 권력을 지금까지 재생산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분석해야 한다. 이것은 지난 30년 동안 경쟁적 협력관계를 맺어온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의 두 개의 바퀴로 확정하는 일이 될 것이다. 아울러 제헌권력이 그 활력을 실현하기 위해서 어떤 실제적 힘들의 결집이 필요한지, 어떠한 비전(이념적 전망)을 갖추어야 하는지, 어떤 정치적 배치가 필요한지를 살펴야 한다. 나는 이 글에서 다중의 글로벌 코뮤니즘이 광주항쟁에서의 제헌권력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경향이자 진로임을 밝힐 것이다.


2010/03/12 07:06 2010/03/12 07:06

local과 global의 어원조사

Posted at 2010/03/08 12:31// Posted in 쓰기(skribi)/언어_L
local (adj.) Look up local at Dictionary.com
late 14c., "pertaining to position," from O.Fr. local, from L.L. localis "pertaining to a place," from L. locus "place" (see locus). The meaning "limited to a particular place" is from 1610s. The noun meaning "a local train" is from 1879; "local branch of a trade union" is from 1888; "neighborhood pub" is from 1934. Related: Locally. Local color is from 1721, originally a term in painting; meaning "anything picturesque" is from c.1900.

globe Look up globe at Dictionary.com
1550s, "sphere," from L. globus "round mass, sphere," related to gleba "clod, soil, land." Sense of "planet earth," or a three-dimensional map of it first attested 1550s.

이 어원에 따른다면 로컬은 장소성을 글로벌은 공간성을, 로컬은 수직성을 글로벌은 수평성을, 로컬은 특수성을 글로벌은 보편성을, 로컬은 일차원성을 글로벌은 삼차원성을 지시한다. 특정성 대 보편성, 지역성 대 범역성, 지역적 대 지구적.

2010/03/08 12:31 2010/03/08 12:31

문제를 단순화해야 한다

Posted at 2010/03/07 12:34// Posted in 쓰기(skribi)/정치_P
문제를 축소할 것이 아니라 단순화해야 한다. 다중의 삶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핵심적인 실천과제를 정식화하고 또 그것을 드러내려면 다양한 변태들로 나타나는 문제들을 절대 축소해서는 안 된다(가령 매판, 독점, 독재, 신자유주의, 파시즘 등등의 단일 이슈로의 축소와 다른 문제들의 그것에의 종속). 필요한 것은 문제를 단순하게 파악하는 것, 그 다양한 것을 관통하는 단순한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다.

1.
첫째로 말해야 할 것은, 자본주의의 본원적으로 자유주의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주의적인 성격이다. (신)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은 우리로 하여금 초점을 놓치게 만들고 끊임없이 자본의 과업을 다중이 대신하도록 만드는 거짓 문제이다.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적인 방식으로 그것의 사회주의적 목적을 달성한다. 경쟁이 자본주의의 자유주의적 근거라면 가치에서의 평균화(한 상품의 가치는 그것의 생산에 사회적으로/평균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다)와 이윤에서의 평균화(평균이윤)는 자본주의의 사회주의적 근거이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실현하는 두 가지 측면일 뿐 결코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사회주의가 위기에 처하면 자유주의가, 자유주의가 위기에 처하면 사회주의가 각각 구출자로 나섰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운동이 자신의 정치학을 자유주의 대 사회주의의 대립 위에 세울 때, 그 의도와는 무관하게 실효에 있어서는 끊임 없이 자본의 필요를 대신 실행하는 대행자로 될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의 은폐된 사회주의적 측면을, 사회주의의 은폐된 자유주의적 측면을 동시에 파악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은 신자유주의가 사회주의를 은폐해 왔고 신자유주의 위기 속에서 사회주의를 끄집어 내어 사용하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두 얼굴인 한에서 자본주의와의 투쟁은 결코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이름으로 전개될 수 없다. 사회주의에 맞서는 자유주의 운동(동구)이나 자유주의에 맞서는 사회주의 운동(서구)은 운동이 거짓 문제의 회로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징후들이다. 이제부터의 운동은 이 틀을 깨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2.
둘째로 말해야 할 것은 자본주의의 본원적으로 민주주의적이면서 동시에 전체주의적인 성격이다.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전체와 개체의 대립은 우리로 하여금 초점을 놓치게 만들고 끊임없이 자본의 과업을 다중이 대신하도록 만드는 또 하나의 거짓 문제이다.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그것의 전체주의적 목적을 달성한다.  자본이 노동력을 소지한 개개인의 자유의지에 기초한다(적어도 노동력을 누구에게 팔 것인가에서 노동자는 자유롭다)는 사실은 자본주의의 민주주의적 근거이다. 그러나 그 자유의지는 반드시 자본에게 노동력을 팔아야만 살 수 있다는 사실(팔 것인가 말 것인가는 자유의지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노동력의 판매와 노동은 잉여가치의 창출이라는 단일한 목적에 봉사한다는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전체주의적이다.  따라서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를 실현하는 두 가지 측면일 뿐 결코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전체주의가 위기에 처하면 민주주의가,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면 전체주의가 각각 구출자로 나선다.

전체주의의 은폐된 민주주의적 측면을, 민주주의의 은폐된 전체주의적 측면을 동시에 파악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은 전체주의의 대명사로 비난되는 파시즘이 대중운동에 의해 추동되었고 민주주의의 대명사로 지칭되는 서구 민주주의가 오늘날 강제수용소를 자신의 통치 무기로 애호하는 것(아감벤)에서 입증된다.  전체주의와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두 얼굴인 한에서 자본주의와의 투쟁은 결코 단순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전개될 수 없다. 전체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서구)나 개인주의에 맞서는 집단주의(동구)는 운동이  자본의 거짓 문제회로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징후들이다. 이제부터의 운동은 이 틀을 깨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이 거짓 문제 회로들에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대립을 포함시킬 수도 있다. 자본은 민족국가들 사이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둘러싼 경쟁을 통해서 자신의 초국적의 목표인 잉여가치 축적을 달성하기 때문이다.

다중의 진로는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틀을 깨면서 출현하는 코뮤니즘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2010/03/07 12:34 2010/03/07 12:34

정치적인 것의 블랙홀

Posted at 2010/03/04 08:38// Posted in 쓰기(skribi)/정치_P
20세기 후반에 득세했던 '정치의 자율성' 명제가 국가의 자율성으로 수용되고 그 결과 정치적 개혁주의의 이론적 버팀목으로 기능한 것의 폐해는 크고 또 길었다. 그것에 대한 비판은 다양한 갈래에서 나타났다. 그 중 우리가 주의해야 할 하나는 반(反)정치의 경향, 즉 정치에 대한 비판을 정치적인 것에 대한 폐기로까지 밀고가는 경향이다. 철학적으로는 현실성에 대한 강조가 잠재성에 대한 강조로 구부려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두 범주의 관계에 대한 엄밀한 사유가 필요한 시점에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메뚜기 뛰기를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경향이 나타나는 방식은 다양하다.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1. 낭만적 아이러니
경험적 자기(현실태)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초월론적 자기의식(잠재성). 이것은 상처를 입거나 패배하는 법이 없는 자기의식이다. 초월론적 자기가 경험적 자기를 경멸할 때 나타난다. (무라카미 하루키에게서 보이듯이) 낭만적 아이러니가 거둔 이 내면의 승리는 투쟁의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가라타니 고진, 『역사와 반복』,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145쪽). 이 회피는 경험적 자기를 패배 속에 지속적으로 머물게 한다.

2. 이론적 근본변혁주의와 정치적 냉소주의
모든 경험적 투쟁들(현실성)로부터 냉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것이  근본적 변혁(잠재성)을 직접적으로 실행하려 하지 않았다고 오직 이론적으로만 비판하면서 결코 실패하거나 패배하지 않을 이론적 자아를 유지하는 것. 사실상 이것은 모든 투쟁들을 허무한 것으로 묘사하는 정치적 냉소주의로 귀착된다. 촛불에 대한 일련의 사후적 이론적 평가에서 이러한 경향들이 노출되었다.(이에 대해서는 조정환, 『미네르바의 촛불』, 갈무리, 2009, 18~65 참조)

3. 이론적 신보수주의
다중지성의 아마츄어성을 비판하면서 고전주의적 인문학의 고수와 발전만이 이 지적 무정부상태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보는 엘리뜨주의. 이것은 구체적 상황 속에서 발전하고 있는 집단지성, 다중지성의 현실적 흐름을 그것 외부에 초월적으로 정립된 인문주의의 이상 속에서 평가한다. 이들은 지적 불평등과 지혜의 위계를 주장함으로써 권력관계를 재구축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이에 대해서는 1존 베벌리의 글 참조)

4. 원시주의
문명과 원시를 대비시키고 문명이 낳은 폐해, 그 실패적 측면을 부각시키면서 문명 대신에 원시, 공업 대신에 농업, 인간 대신에 자연, 능동 대신에 수동, 사회 대신에 공동체, 현재 대신에 과거, 세계 대신에 지역, 기술 대신에 마음, 정부 대신에 무정부 등등의 경직된 이분법과 양자택일을 제시한다. 다른 경향들과 마찬가지로 이 경향도 잠재성을 현실성과 연결짓는 데 실패하며 특이성(singularity)2을 공통되기의 실제적 과정 속에 개방하기보다 초월적 위치로 끌고간다. 특이함들의 공통되기보다 그것의 고고하게되기, 혹은 고대적으로되기가 선택되면서 현실적인 것에 정치적 접근은 방기된다. (이에 대해서는 http://amelano.net/1637)

대략적으로 생각해본 바, 잠재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급하게 이동한 이 조류들은 정치적인 것을 사유할 수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이 경향에서 아이러니,  근본성, 인문학, 원시성 등은 정치적인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기능한다. 그렇다고 이 경향들이 정치와 담을 쌓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정치와 관계 맺을 때, 이 경향들은 극단적으로 실용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곤 한다. 실제로 정치 그 자체가 커다란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에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가 중요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실용주의가 그들의 행보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이들은 자신들의 사유가 초월적이면 초월적일수록 정치에서는 자신의 관심을 실현하기에 현실적으로 힘 있는 것, 실제로 유용한 것, 달성 가능한 것, 지속가능한 것 등을 추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직접적 유용성 관심이 이 경향을 지배한다.  그래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유의 부재는 실제에서 '좌충우돌'의 정치적 태도를 산출하곤 한다.

이러한 사유와 감성의 정세 때문에 평등 명제에 입각한 정치적인 것의 재구축 시도(랑시에르), 해방이나 변형과 구분되는 시민인륜적 갈등에 입각하여 민주주의를 재구축하려는 시도(발리바르), 맑스의 혁명적 코뮤니즘(운동)을 마키아벨리적 계기(정치적인 것)를 통해 실현하려는 시도(네그리/하트) 들이 매우 의미심장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필요가 있다.



  1. 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1451&p_no=1 [Back]
  2. 원시성으로 이해되는 것은 실제로는 문명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특이성들이다. 특이성들은 문명의 바깥에서 찾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 속에서 문명에 대항하고 있는 것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Back]
2010/03/04 08:38 2010/03/04 08: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