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후반에 득세했던 '정치의 자율성' 명제가 국가의 자율성으로 수용되고 그 결과 정치적 개혁주의의 이론적 버팀목으로 기능한 것의 폐해는 크고 또 길었다. 그것에 대한 비판은 다양한 갈래에서 나타났다. 그 중 우리가 주의해야 할 하나는 반(反)정치의 경향, 즉 정치에 대한 비판을 정치적인 것에 대한 폐기로까지 밀고가는 경향이다. 철학적으로는 현실성에 대한 강조가 잠재성에 대한 강조로 구부려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두 범주의 관계에 대한 엄밀한 사유가 필요한 시점에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메뚜기 뛰기를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경향이 나타나는 방식은 다양하다.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1. 낭만적 아이러니
경험적 자기(현실태)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초월론적 자기의식(잠재성). 이것은 상처를 입거나 패배하는 법이 없는 자기의식이다. 초월론적 자기가 경험적 자기를 경멸할 때 나타난다. (무라카미 하루키에게서 보이듯이) 낭만적 아이러니가 거둔 이 내면의 승리는 투쟁의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가라타니 고진, 『역사와 반복』,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145쪽). 이 회피는 경험적 자기를 패배 속에 지속적으로 머물게 한다.
2. 이론적 근본변혁주의와 정치적 냉소주의
모든 경험적 투쟁들(현실성)로부터 냉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것이 근본적 변혁(잠재성)을 직접적으로 실행하려 하지 않았다고 오직 이론적으로만 비판하면서 결코 실패하거나 패배하지 않을 이론적 자아를 유지하는 것. 사실상 이것은 모든 투쟁들을 허무한 것으로 묘사하는 정치적 냉소주의로 귀착된다. 촛불에 대한 일련의 사후적 이론적 평가에서 이러한 경향들이 노출되었다.(이에 대해서는 조정환, 『미네르바의 촛불』, 갈무리, 2009, 18~65 참조)
3. 이론적 신보수주의
다중지성의 아마츄어성을 비판하면서 고전주의적 인문학의 고수와 발전만이 이 지적 무정부상태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보는 엘리뜨주의. 이것은 구체적 상황 속에서 발전하고 있는 집단지성, 다중지성의 현실적 흐름을 그것 외부에 초월적으로 정립된 인문주의의 이상 속에서 평가한다. 이들은 지적 불평등과 지혜의 위계를 주장함으로써 권력관계를 재구축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이에 대해서는
존 베벌리의 글 참조)
4. 원시주의
문명과 원시를 대비시키고 문명이 낳은 폐해, 그 실패적 측면을 부각시키면서 문명 대신에 원시, 공업 대신에 농업, 인간 대신에 자연, 능동 대신에 수동, 사회 대신에 공동체, 현재 대신에 과거, 세계 대신에 지역, 기술 대신에 마음, 정부 대신에 무정부 등등의 경직된 이분법과 양자택일을 제시한다. 다른 경향들과 마찬가지로 이 경향도 잠재성을 현실성과 연결짓는 데 실패하며 특이성(singularity)
을 공통되기의 실제적 과정 속에 개방하기보다 초월적 위치로 끌고간다. 특이함들의 공통되기보다 그것의 고고하게되기, 혹은 고대적으로되기가 선택되면서 현실적인 것에 정치적 접근은 방기된다. (이에 대해서는 http://amelano.net/1637)
대략적으로 생각해본 바, 잠재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급하게 이동한 이 조류들은 정치적인 것을 사유할 수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이 경향에서 아이러니, 근본성, 인문학, 원시성 등은 정치적인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기능한다. 그렇다고 이 경향들이 정치와 담을 쌓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정치와 관계 맺을 때, 이 경향들은 극단적으로 실용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곤 한다. 실제로 정치 그 자체가 커다란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에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가 중요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실용주의가 그들의 행보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이들은 자신들의 사유가 초월적이면 초월적일수록 정치에서는 자신의 관심을 실현하기에 현실적으로 힘 있는 것, 실제로 유용한 것, 달성 가능한 것, 지속가능한 것 등을 추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직접적 유용성 관심이 이 경향을 지배한다. 그래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유의 부재는 실제에서 '좌충우돌'의 정치적 태도를 산출하곤 한다.
이러한 사유와 감성의 정세 때문에 평등 명제에 입각한 정치적인 것의 재구축 시도(랑시에르), 해방이나 변형과 구분되는 시민인륜적 갈등에 입각하여 민주주의를 재구축하려는 시도(발리바르), 맑스의 혁명적 코뮤니즘(운동)을 마키아벨리적 계기(정치적인 것)를 통해 실현하려는 시도(네그리/하트) 들이 매우 의미심장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필요가 있다.
http://amelano.net/trackback/16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