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정치의 양식으로서의 예술

Posted at 2010/02/07 12:23// Posted in 쓰기(skribi)/시학_P
바디우는 예술을 철학과의 관계 속에서 사유하면서 철학과 예술이 맺는 관계를 비미학(inesthétique)이라고 부른다. 비미학에서 예술은 스스로 진리를 생산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철학을 위한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몇 가지 예술작품들의 독립적 실존이 만들어내는 순전히 철학 내적인 효과를 기술한다".1

비미학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철학과 예술이 맺은 역사적 관계양식들에 대한 그 나름의 정리에 기초한다. 20세기에 철학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세 가지 도식에 따라 예술과 관계를 맺는다. 즉 철학은 예술에 대해 지도적이었거나(맑스주의) 낭만적이었거나(해석학) 고전적이었다(정신분석). 이것은 진리와의 관계에서 정의된다. 지도적 도식은는 예술은 (철학이 담지하는 바의) 자신 외부에 있는 진리를 모조한 가짜진리를 직접적으로 현시한다고 보았다(플라톤에서 브레히트로 이어지는 흐름). 낭만적 도식은 예술만이 진리를 육화할 수 있고 철학은 그것을 해석한다고 본다(니체, 하이데거, 들뢰즈). 고전적 도식은 예술이 진리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미메시스(사이비질서)를 수행하는데 그것은 예술의 목적이 인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치유(카타르시스)에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아리스토텔레스에서 프로이트, 라깡으로의 흐름).

바디우는 이 세 가지 도식이 포화상태에 도달한 상태에서 20 세기에 새로운 종합도식이 시도되었고 그것이 아방가르드(브르통과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상황주의)라고 말한다. 그것은 고전적 도식에 대항하여 지도적 도식과 낭만적 도식을 중재하고 불안정하게 그것을 추구한다. 그의 글을 읽어보자.

예술에 종말을 고하려는 욕망에서, 소외되어 있으며 진짜가 아니라는 예술의 성격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는 지도적이다. 또한 예술이 절대성으로서, 그 고유의 작용들에 대한 온전한 의식으로서 즉시 읽어낼 수 있는 그 자신의 진리로서 조만간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는 낭만적이다.(21쪽)

말하자면 아방가르드는 "창조적 파괴"의 절대성으로서 바디우에 따르면 그것은 지도적 낭만주의 도식이다.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세 가지 도식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면 이 새로운 종합도식은 완전히 막을 내리고 사라졌다. 그래서 바디우는 새로운 철학과 예술을 맺는 네 번째의 도식을 제안한다. 그것은 내재성과 독특함의 동시성을 긍정하는 도식이다. 예술은 그 자체가 하나의 진리의 절차이며(내재성), 그것은 다른 진리들(과학의 진리, 사랑의 진리, 정치의 진리 등)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철학은 다른 진리의 절차들과의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술과의 관계에서 예술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24). 어떤 실제적인 진리도 생산하지 못하고 오직 진리들을 파악하거나 보여줄 뿐인 철학이 그것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술적 짜임configuration artistique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술적 짜임은 "규정가능한 어떤 기간으로 사건을 통해 시작되고 이론상 무한한 작품들의 복합체로 구성되며 전적으로 해당 예술 내부에서 그 기간이 그 예술의 하나의 진리, 하나의 진리예술vérité-art2를 만들어 낸다고 할 수 있는 단위"(30)이다. 철학은 사유하는 주체인 작품들로부터 예술적 짜임을 드러냄으로써 그것을 의견들로부터 분리시키고 이렇게 함으로써 시간을 영원(유적 무한으로서의 진리)을 향해 돌려놓는 일을  수행한다(33).

이러한 비미학은 예술을 과학이나 사랑이나 정치로부터 독립시키는 훌륭한 방법이긴하다. 하지만 그것은 예술을 (물론 과학이나 정치나 사랑도) 철학의 품안에 품거나 혹은 그것의 아래에 거느리는 방법이다. 마치 나이든 사람들이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의 생식성에 기대면서 그들을 자신의 품에 거느리려 하듯이. 다른 길이 필요하다. 그것은 예술을 과학이나 정치나 사랑과 함께, 아니 철학까지도, (진리의 평면이 아니라) 삶의 평면에서 살도록 하는 것이다. 이럴 때 예술은 삶의 잠재력의 현전일 것이며(낭만적), 그 현전양식들과는 다른 독특한 현전(광의의 미메시스)일 것이고(지도적), 그 현전은 삶을 전체적으로 새롭게 여는 정화, 치유, 혁신의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고전적). 아방가르드가 예술의 종말을 갈구한 것은 지금까지의 예술이 삶의 평면에서 움직이기보다 삶을 오히려 예술 속에 봉쇄하는 전도된 위치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현실을 고발한 것이다. 우리는 그 문제의식을 안고 가야 한다. 아방가르드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그것을 더 철저하게 다중의 자기예술, 삶예술의 수준으로까지 철저화하는 것이다.   
  1. 알랭 바디우, 비미학, 이학사, 2010, 5쪽. [Back]
  2. 역서에는 예술진리로 번역되어 있지만 필요상 말을 바꾼다. [Back]
2010/02/07 12:23 2010/02/07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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