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광주, 학살자 미국의 정체를 폭로하다
http://www.2010corea.or.kr/travel/time_tour.asp?tm=tm09&mode=t

10.26 사태 이후 사회 각계에서는 유신독재의 잔재를 숙청하고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움직임이 벌어졌고, 그 기운은 날이 갈수록 더욱 확산되어 갔으며 심지어 군부 내에서까지 그에 동조하는 경향이 노골적으로 표면화되었다. 이에 당황한 미국은 겉으로는 한국의 민주와를 지지하는 것처럼 했지만, 실은 그 배후에서 민주세력을 진압할 흉계를 꾸몄다. 12.12 군사 쿠데타나 5.18 광주학살만행도 모두 그 연장선상의 사건들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광주학살 개입 경위
1. 5월 13~14일 광주학살 실전 훈련인 ‘코프 제이드80 Ⅱ’ 한미연합훈련 전개
2. 5월 18일 직전 광주 거주 미국인 전원 철수
3. 5월 18일 계엄군 병력이동 승인
4. 5월 22일 최종진압을 위해 20사단 투입 승인
5. 조기경보기 2대, 항공모함 코럴시호 급파
6. ‘한미간 협의사항, 24일까지 대기’라는 기록, 광주 투입 군대의 작전일지에서 확인
7. 광주학살 후 6월 2일 미 카터 정권의 전두환 지지 천명
8. 8월 7일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 ‘들쥐발언’
광주시민들이 진압군을 물리치고, 광주를 해방시켰던 80년 5월 22일, 미 백악관에서는 모스티 미국무장관, 브라운 미국방장관, 브레진스키 미국대통령 안보담당특별보좌관, 미합참의장, 터너 CIA국장, 크리스토퍼 미국무차관 등 미국의 고위 정책 작성자들의 참석 하에 이른바 ‘광주사태 수습 대책 안에 대한 긴급회의’가 열렸다.

이 날의회의 결정에 따라5월 22일에 위컴은 국군 두 개 사단 출동을 허용했고 전두환의 이른바 친위사단이라고 하는 20사단을 비롯한 대병력과 탱크, 장갑차 등 군장비들을 광주에 급파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서울신문’과 ‘제1라디오’는 미국이 신군부세력에게 “연합군의 지휘 하에 있는 군병력을 사용하도록 허용했다”고 폭로하였으며, 미국신문 ‘저널오브코미스’는 “광주학살작전과 군의 투입을 지지한다”는 미국의 공식입장이 ‘신군부’에 전달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일본에서 발행되는 잡지 ‘통일평론’(1981년 9월호)에 따르면 전두환 자신도 1980년 5월 30일 진행한 기자회견에서 “미국대사는 광주에서의 잔학행위를 한국사회의 안정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을 고무했다”고 미국의 배후조종과 개입관계에 대해 실토하였다.

5월 23일 미국은 항공모함 ‘코럴시’호를 축으로 한 미사일 구축함 두 척과 순양함, 보급함등 7척으로 구성된 기동 타격군을 한국주변 앞바다에 투입하였다. 그리고 미 제7함대 소속 항공모함인 ‘미드웨이호’, 공군정보통제기 ‘e3e’ 두 대를 한국 주변에 급파하였다. 즉, 미국은 신군부가 진압에 실패해 무장항쟁이 전국적으로 번질 경우 주한미군을 직접 동원하려고 항공모함을 파견한 것이었다.

그 뒤로 국민들은 미국이 학살군을 투입하기 위해 부산항에 항공모함을 불러들인 5월 22일을 ‘반미의 날’로 선포하고 1980년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19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등으로 그 투쟁이 이어졌다.

Trackback url :: http://amelano.net/trackback/688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