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를 제국주의 침략과 동일시하거나 자본의 일방적 폭력으로 정의하는 것으로는 지난 30년 역사를 설명하기 어렵다. 만약 신자유주의가 제국주의적 침략이었다면 흔히 신자유주의 종주국으로 간주되는 미국에 대한 수 많은 나라들 및 그 나라의 국민들의 조용한 수용,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1945년 이전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해방투쟁과는 비교될 수 없는, 이 종주국에 대한 저항의 부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이른바 종주국인 미국이 신자유주의 30년을 경유하면서 식민지를 강탈한 성과로 강국이 되기는커녕 천문학적 재정적자와 무역적자에 허덕이는 빚쟁이 나라로 전락하여 패권 상실의 위기에 놓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 만약 신자유주의가 자본의 일방적 폭력의 효과라고 본다면 그 일방적 폭력이 순식간에 세계제패의 논리로 정착되는 것을 순순히 허용할 만큼 그 폭력이 강력하고 민중들이 무력했다는 것일까?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가 지난 30여년 동안 세계를 통치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며 그 메커니즘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는 다른 길을 찾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종말과 공위국면에서 실제적 대안을 찾는 일의 전제조건일 것이다.

여기서 나는 신자유주의가 케인즈주의에 대항한 아래로부터의 투쟁들에 맞서 케인즈주의를 폐기하고 다시 시장으로 돌아선 것이 아니라 그 투쟁들의 힘을 축적 동력으로 흡수하면서 케인즈주의를 국제적 수준으로 확장하고 재편했다는 가설에 대해, 그리하여 케인즈주의가 그 고유의 주체성을 생산했듯이 신자유주의도 그 고유의 주체성을 생산해 냄으로써 지난 30년의 순환을 끌고 왔다는 가설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케인즈주의는 1917년 혁명에서 나타난 노동자의 불복종성에 대한 자본의 적응방식이자 자본의 사회화, 사회화된 자본 범주를 전 세계적으로 일반화한 과정이었다. 이것은 정도와 양태의 차이는 있었지만 동구의 사회주의, 서구의 케인즈주의,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의 파시즘이 공유한 과정이었다. 일본의 총력전 학파는 일본 파시즘이 노동계급을 축적 드라이브 속에 끌어들였고 사회주의자들조차도 대동아공영 논리에 흡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전후 일본 민주주의는 이 총력전 논리의 연장이지 결코 그것과의 단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분석시각은 일본 파시즘에만 적용될 것이 아니라 20세기 자본주의의 일반문법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20세기의 자본주의들은 노동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본에 내부화함으로써 자본과 노동의 총력전을 수행하는 체제였다. 소련의 인민헌법, 이탈리아의 노동헌법 등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듯이 노동의 힘은 헌법 속에 새겨졌고 케인즈는 노동의 힘에 대한 승인만이 공황에서 자본을 구출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이 시기에 인민대표자회의, 노사정위원회 등으로 표현되는 계급간 협상과 타협의 기구들이 발전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생산성 임금, 복지혜택, 사회안전망, 대중소비사회 등은 노동의 힘이 승인되는 방식이면서 동시에 노동이 자본에 포섭되는 방식이었다. 이 시기에 노동계급은 부분적으로 권력을 분점했고 생산성 임금과 사회적 임금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다. 노동조합과 노동당은 케인즈주의의 고유한 생산주체성으로 자리잡았고 이것은 경제적 생산의 수준에서는 테일러주의, 사회적 분배의 수준에서는 포드주의, 정치적 통합의 수준에서는 국가개입의 일반화에 기초한 케인즈주의가 가동되는 삼위일체 구조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 체제는 대외적으로는 국경을 따라 분할된 체제였고 내부적으로는 배제되는 계급들을 생산하는 체제였다. 1968혁명으로 상징되는 저항은 이들 배제된 계급들(비보장노동자들)이 다른 방식으로 조직되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노동거부를 통해 테일러주의를 공격하고 정치적 임금요구를 통해 포드주의의 한계를 드러냈으며 관료주의 비판을 통해 국가개입방식의 문제를 비판했다. 신자유주의가 이 운동과 혁명에 대한 대응양식임은 이미 반복해서 말한 바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의 대응양식은 무엇이었는가?

노동거부에 대한 대응은 첫째 생산자본의 금융자본으로의 전화였으며 둘째 기계화와 정보화를 통한 정리해고였다. 이로써 노동거부의 예봉은 꺾인다. 자본이 전술적으로 노동에 대한 필요성을 축소시키는 현실에서 노동거부는 오히려 자본의 작업을 도와주는 것으로, 즉 정리해고를 수월하게 만들어주는 것으로 기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본의 이러한 대응의 효과는 오늘날 실업자와 비정규직의 양산이라는 현실로 나타났다. 이리하여 케인즈주의 삼위일체 총력전 체제의 외부에 발생하고 있었고 68혁명의 추동력이었던 이 배제된 제4지대, 사회적 사막화 지대는 더 거대해진다. 고용되지 못한 이들은 사회적 정치적 임금을 받기는커녕 전혀 지불받지 못하거나 제대로 지불받지 못하는 노동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이 지대는 프랑스의 2005년 방리외 봉기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듯이 세계 전역의 사회심층에 가연성 폭발물로 잠복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것이 오직 간헐적으로만 그것도 국지적으로만 폭발하도록 관리되어온 메커니즘은 무엇일까? 첫째로는 채무폭탄이다. 지난 30년간 거대해진 소비자신용, 즉 가난한 사람들의 채무는 생존의 위기상황 속에서 그 위기의 폭발을 미봉하는 장치로 작용했다. 채무는 형식과 절차는 다르지만 케인즈주의 하에서 복지금이 수행하던 역할을 대신한다. 소비자신용이 사람들의 마지막 피한방울까지 빨아들이는 흡혈장치임은 너무나 분명하지만, 그것은 또한 가난한 사람들이 신용불량자가 되기까지는 생존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장치임도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채무의 개인화 혹은 개인화된 채무는 경제적 방식으로 수행되는 통치수단이기도 하다.

중국을 비롯한 신흥산업국의 기능을 생각해보자. 테일러주의가 케인즈주의 시대에는 공장수준에서 작동했다면 신자유주의 하에서 테일러주의는 몇 개의 국가 수준에서 작동한다. 중국과 인도, 특히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서 테일러주의의 농축지대로 기능했다. 저임금장시간 노동이 중국 노동자의 운명으로 부과되었고 중국의 공장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저가의 상품들은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을 비롯하여 전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케인즈주의적 복지혜택(외부로부터의 가격인하를 통한 임금상승 효과)처럼 주어졌다. 이런 조건 하에서 (크게 보아) OECD 나라들의 조직된 노동자들, 정규직 노동자들은 임금 외에 저축 이자와 연금 보장, 부동산 임대료, 주식 배당금 등 다양한 형태의 지대(rent)를 향유할 수 있는 지대수령-임금노동자계급으로 배치되었다. 이들은 신자유주의의 수혜집단으로서 신자유주의 고유의 내부 주체성을 구성한다. 이 주체성은 오늘날 대기업 노동조합의 행동양식에서 확인되듯이 신자유주의의 개혁을 원하지만 신자유주의의 해체를 원치는 않는다.

신자유주의에서 국가수준의 변화는 어떠한가? 케인즈주의가 폐기되었다는 것은 속단이다. 신자유주의 제국의 군주국인 미국은 국가개입을 오히려 더 강화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군사적 케인즈주의는 지난 30년간 미국의 재정적자를 누적시켜온 주요 원인이다. 1980년부터 수년에 걸친 이란-이라크 전쟁, 1991년의 걸프전, 그에 이어진 발칸전, 아프가니스탄전, 2차 걸프전, 그리고 마침내 테러에 대한 전쟁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전쟁을 생리고 삼는 국가로 전화했고 거대한 군비지출이 여기에 수반되었다. 저임노동자들에 대한 거대한 착취를 통해 축적된 중국의 거대한 부는 미국의 국채 구입비로 다시 유입되었고 이것은 신용불량자에게까지도 신용을 줄 수 있는 풍부한 저수원(서브프라임 모기지)으로 기능했다.

이상의 고찰은 신자유주의 제국이 세계적 수준으로 확장되고 재편되고 전환된 케인즈주의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제국의 최상층에서 국가주도의 케인즈주의가 작동하며 그 중간층에서 정규직 노동자가 잉여가치 구성물로서의 지대를 분배받는 포드주의 주체성을 구성하며 그 아래에서 중국을 비롯한 세계의 신흥산업국 노동자들이 테일러주의적 노예노동에 시달리고 최하층에서는 실업자를 비롯하여 어떤 보장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개인화된 채무로 연명하는 구조. 거꾸로는 최하층의 불불노동이 금융축적의 원동력이 되고 저임노동자들의 노동착취에 기초한 부 및 정규직 노동계층의 지대가 금융자본의 밑천으로 된다. 이 자본은 다시 미국 국채 구입비로 전용되어 미국으로 하여금 수십년간이나 군사무기에 무한대의 지출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연속전쟁을 통한 공포를 일상화할 수 있게 했다. 40여대의 전투기가 출항준비를 갖추고 있는 운동장 세 개 규모의 갑판, 원자력 발전소를 내장하여 20여년간 어떤 에너지공급도 없이 항해할 수 있는 에너지 시스템, 내부에서 자체 제작되는 신문 방송 시스템 등을 갖춘 미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는 이 메커니즘에서 생산된 괴물의 하나일 것이다.
2010/07/24 11:47 2010/07/24 11:47
지산 님, 댓글( http://waam.net/xe/20428#comment_20471 ) 감사합니다. 토론을 계속하기 위하여 내가 지금 도달해 있는 생각을 비교적 단호한 어조로 표현하겠습니다.

발전develop-ment은 인간과 생명의 창조적 자기진화self-evolution가 부르주아적 적대적 방식으로 나타나는 형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특히 선진화 이데올로기가 발호하고 있는 현실에서 발전에 대한 비판이 단호할 필요가 있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 비판의 효능은 단순한 발전거부(혹은 변증법적 반립명제로서의 반발전)가 아니라 인간의 창조적 진화의 옹호(발전과 반발전 사이의 사선)에서 주어져야 할 것이라는 관점에서 주어진 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밝히고자 합니다.

다음 구절은 우리 모두가 성찰적 태도로 살펴보아야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노동운동에서 ‘기계파괴운동’이나 ‘노동거부투쟁’이 자본에 대항한 투쟁의 양식으로 오히려 더욱 급진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본의 이데올로기와 욕망에 포획된 정도로 봐서는, 시민들은 물론이거니와 아마도 노동자들 대부분도 이러한 투쟁에 동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노동거부투쟁은 1990년대 중반 이후 나의 사유의 중심에 놓여 있는 화두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우선 말해 두고 싶은 것은 기계파괴와 노동거부(양자는 결코 동일시 될 수 없는 것이므로 아래에서 구분해서 논하겠습니다) 투쟁의 급진화에 시민, 노동자 대부분이 동의하기 어려우리라는 '직감'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예상되는 직감의 원천을 '시민, 노동자가 자본의 이데올로기와 욕망에 포획된 정도의 심각성'에서 찾는 것은 위험합니다. 이것은 다시 전위주의와 이른바 '대중'에 대한 선험적 한계부여(자생성론)를 반복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본 안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만큼, 아니 그보다도 더 사실은 자본도 우리 안에서 '발전'합니다. 자본은 노동자들의 삶의 욕망과 사용가치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용가치 없이 교환가치 없다는 맑스의 단언은 이 사실에 대한 직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발전'은 그것이 아무리 문제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결코 우리 외부에 있지 않고 우리 내부에 있는 욕망이고 논리학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자본내재적인 논리학, 자본의 논리학으로 나타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노동외재적인 것은 아니며 사실은 노동내재적인 논리의 전도형태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노동거부가 자기진화의 거부로 될 때 원시주의(John Zerzan1을 참고하기 바랍니다.)로 귀착되고 또 유나바머처럼 고립된다는 것은 1950~60년대의 노동거부 운동의 이후 발전이 보여주는 바 입니다. 노동거부는 임노동의 거부, 소외된 노동의 거부로 이해되어야 하고 바로 그 거부투쟁(네거티브 투쟁)은 자기가치화, 자기진화, 자기조직화의 시공간을 열어내는 구성투쟁(포지티브투쟁)으로 이어질 때 의미를 갖게 됩니다. 특히 정리해고의 방식을 통해 포드주의 하에서의 노동거부 운동을 흡수한 신자유주의 하에서 글자 그대로의 노.동.거.부 운동은 신자유주의를 거드는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기계파괴는 전술적으로만 채택될 수 있고 전략적으로는 고려되어서는 안 되는 관점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날 기계발전은 자본의 축적논리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기계를 위한 기계의 발전이 나타나고 그래서 삶과 배치되는 기계들의 일종의 강시적인 발전이 나타납니다. 예컨대 오늘 아침 조선일보는 이번에 한미연합군사훈련을 위해 부산항에 들어온 조지 워싱턴호에 대해 숭고감이 실린 어조로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갑판은 1만8211㎡로 축구장 3개 크기다. F-18을 비롯해 호크아이 조기경보기, 나이트호크 헬기 등 40여대의 항공기들이 전열을 갖추고 있었다. 데이브 헥트(Dave Hecht) 공보장교는 "전투기들은 출격 명령이 떨어지면 2초 안에 속도를 시속 220㎞까지 끌어올리며 이륙한다"고 했다. 조지 워싱턴호는 소형 원자력 발전소 역할을 하는 원자로 2기가 있어 연료 공급 없이 20년간 운항할 수 있다. 최고 속도는 30노트(시속 55㎞)다. 조지 워싱턴호는 승조원이 약 5000명에 달해 '바다 위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선실은 3360개, 여기에 각종 휴식·편의시설이 있고 내부 소식을 전하는 신문과 라디오·텔레비전 방송이 따로 있다.2

전쟁을 위해 개발된 이 이상비대화된 기계류가 그 자체로 노동내재적인 힘의 자연스런 발전이라고 말한다면 어불성설이겠지요. 전도 속에서 이루어지는 기계류의 발전과정은 이미 온갖 질병현상들로 심한 병통을 앓고 있습니다. 이 질병을 치유하는 외과수술적 요법으로 때로는 기계파괴가 동원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기계파괴가 전략으로 추구되는 순간, 그것은 원시주의적 고립으로의 추락을 면할 수 없습니다. 내가 보기에 원시주의는 삶과 실재에 대한 상당한 권위주의를 함축하는 사유양식입니다. 기계는 파괴됨으로써가 아니라 재전유됨으로써, 그리고 인간의 자기진화의 필요에 종속되는 인간의 지성과 사회성의 표현으로 배치됨으로써 해방과 자유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발전론, 선진화론에 대한 비판과 거부는 자본 중심적 발전 개념 대신 중성적 개념인 변화, 흐름이라는 개념을 선택하는 것으로 나아가기보다 자기가치화와 자기조직화를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노동(사실은 삶활동으로서의 함doing)의 자기진화라는 적극적 개념으로 나아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지난 20년 동안 19,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의 파국 앞에서 많은 비판적 지식인들이 전망을 잃고 시간에 대한 묵시록적 관점으로 기울어졌습니다. 그만큼 이것은 사회주의 운동이 발전주의에 동화되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발전주의에 대한 비판이 많은 경우에 정지로서의 시간이라는 신비주의적 관점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우리는 지금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의 시간이 약동, 활력, 도약이 아니라면 , 시간이 주체성의 발생과 작용의 장이 아니라면, 생명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정지의 시간론은 활력적인 약동으로서의 생명을 죽음을 기준으로 정렬시킵니다. 발전으로서의 진보라는 환상을 쫓아온 사람들이 여기에서 일시적으로 편안함을 느끼지만 곧 그것은 무기력과 냉소로 나아가고 다시 냉소는 거대한 권위주의가 되어 되돌아 옵니다. 정지로서의 시간 (나는 여기에서 유사한 용어를 쓰는 벤야민을 타겟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의 개념은 훨씬 더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개념은 끊임없는 진보로서의 시간이라는 부르주아적 관념 앞에서의 공포가 표현되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죽음충동입니다. 단선적 진보로서의 시간론이 물질을 선형적 운동으로 표상한다면 정지로서의 시간론은 물질을 정지로서 표상하는데 이 모두는 생명에게 물질의 시간을 부과하려는 폭력이 발현되는 방식입니다. 이 때야말로 생명은 진화이고 자유이며 편위이고 도약이라는 것, 그것이 발전의 직선(straightline)도 정지의 점(point)도 아니라는 것, 그것은 변증법적 정립선과 반정립선의 대각을 해체하는 사선(diagonal)이고 차이를 함축하는 반복이자 반복을 함축하는 차이로서의 나선(spiral)임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토론이 계속될 수록 우리의 생각이 더 깊어질 수 있겠지요.
다음 시간을 기다리며 여기서 마칩니다.

2010/07/22 12:55 2010/07/22 12:55

대도시의 주체구성

Posted at 2010/07/22 10:09// Posted in 쓰기(skribi)/시학_P
『아케이드 프로젝트』 의 3권 다섯 부분(산책자, 생시몽과 철도, 음모와 동업직인조합, 푸리에, 마르크스)은 대도시의 주체구성을 다룬다.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중의깊에 읽어야할 부분이다. 앞서 다른 주제들에 대한 좀더 선명한 그림이 이 부분에서 등장한다.

벤야민이 대도시를 관찰대상으로 삼기 시작한 것은 한편에서는 작업장과 공장,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에 집중되고 있었던 19세기~20세기 초 비판이론들과는 달리 그것의 매개항을 설정하는 것이다. 아니 대도시를 중심으로 작업장과 국가를 분석하고자 하는 전략이다. 오늘날 대도시의 중요성은 벤야민이 분석하고 있는 19세기 시대에 비해 엄청나게 커졌다. 벤야민이 보고 있는 대도시는 주로 상품유통의 공간이지만 오늘날 대도시는 상품생산공간으로 바뀌었다. 그것에는 비물질적 상품도 포함된다.

첫 세 부분까지에서 벤야민의 주체성론은 군중을 바탕으로 하여 오른편에 생시몽주의자가 놓이고 왼편에 블랑키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있으며 그 가운데 산책자들 및 푸리에주의자들이 놓이는 구도이다. 보나빠르트를 비롯한 권력의 행위자인 경찰과 경찰스파이는 대도시에 공기처럼 퍼져있다. 이들이 직접 결사를 조직해서 운영하기도 한다. 12월 10일회는 그런 것 중의 하나이다.

자본주의적 상품사회가 등장하고 이에 매혹된 군중이 역사 무대에 등장한다. 모두가 군중의 일부이다. 이후에 상황주의자들에게서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게 되는 구경꾼(badaud)은 상품사회에 매혹된 산책자이다. 산보자promeneur는 상품사회에 대해 즐거운 태도를 갖는 산책자이다. 벤야민은 이들로부터 산책자fleneur를 구별해 낸다. 산책자는 상품에 대해 매혹의 태도도 즐거움의 태도도 갖지 않으면서 상품의 교환가치를 자신의 개념으로 삼고 스스로 교환가치로 기능하도록 하는 마법을 가진 존재로 그려진다. 산책자는 양극적이다. 그는 도시를 실내화(방)하면서 동시에 실외화(풍경)한다. 이것를 벤야민의 파리 중산계급의 태도로 규정한다.

생시몽주의자들은 산업의 발전과 기술의 발전을 유토피아적 힘으로 묘사한다. 이런 의미에서 생시몽주의는 산업부르주아지의 이익을 표현한다. 철도망의 발전은 기술의 발전을 매개로 하여 인구를 재통합(re-ligare)하는 현대화된 종교이다.

대도시에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을 혁명적 움직임에 벤야민은 주목한다. 결사체들(예컨대 계절사)은 당대의 혁명적 담론공간이었던 술집을 무대로 움직이면서 매우 다양한 형태로 발전한다. 경찰스파이들은 아예 술집을 차려서 이들의 동태를 관찰한다. 비밀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혁명은 음모이지 않을 수 없다. 어떤  revolutionary plan,  new plot, tactiical strategy는 intrigue나 conspiracy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벤야민의 서술은 영화를 보듯이 구체적이고 그 시선은 미시적이다. 주체성의 배치에 대한 벤야민의 시선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푸리에와 마르크스에 관한 서술을 읽은 후 보충되어야 할 것이다.






2010/07/22 10:09 2010/07/22 10:09
미국산 쇠고기 수입, 대운하 혹은 4대강 사업, 민영화, 금융화, 정보화, 정리해고, 신형기관차에 대한 지하철1인 승무제 도입, 노동조합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 등등은 모두 자본이 도입하(려)는 정책들이다. 요즘와서 사회적 쟁점, 사회적 갈등은 주로 자본이 새로운 정책을 도입하고 노동이 그것에 반대하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자본은 공격하고 노동은 방어하는 것으로, 자본은 제안하고 노동은 반대하는 것으로 갈등의 지형이 구축되고 있다. 그래서 노동의 투쟁은 많은 경우에 예전 것을 지키기 위한 투쟁, 즉 보수투쟁의 모습을 취한다. 이것은 현재 노동의 힘이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일 뿐만 아니라, 노동이 자본의 행동에 반대하는 것을 넘어서는 적극적 대안세력으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투쟁은 노동의 주도 하에서 시작될 수도 있고 자본의 주도에 대한 반대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 1990년대 초까지의 임금인상투쟁이나 노동시간 단축, 노동조건 개선 투쟁은 노동의 주도 하에서 시작되었다. 반면 이후의 많은 투쟁들은 자본의 주도에 대한 반대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분명히 역관계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인식과 전망의 수준을 반영하기도 한다. 1990년대 초까지의 투쟁들이 노동 주도적일 수 있었던 것은 당대의 사회주의 정치운동들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혁명의 관점을 갖고 있었고 그것에 대한 노동자들의 상당한 공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래로부터의 투쟁은 (개혁적인 투쟁들조차도) 혁명의 관점이 사회 전체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을 때 주도적이고 공세적 방식으로 나타났다. 현대중공업의 골리앗 투쟁은 이러한 투쟁의 뚜렷한 사례로 남아 있다. 1990년대에 들어 노태우 정권이 위로부터 무노동무임금 공세를 시작하고 그것에 대한 반대가 운동의 반응으로 나타났던 것이 공세에서 수세로의 전환점이었다.

자본의 위로부터의 공세에 대한 수세적 대응이 투쟁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본다면 그것은 잘못일 것이다. 노동주도적 쟁점이 아니고 자본주도적인 쟁점(주로는 노동자의 삶을 침식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투쟁을 시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노동이 자신의 삶을 방어하는 것, 더 나쁘지 않은 삶을 추구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고 또 중요한 투쟁의 이슈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된 투쟁이 더 나쁘지 않게 되는 것에 '머무는' 것은 불행하다. 노동의 일련의 투쟁들이 방어투쟁에 머물다보니 이제 노동투쟁은 방어투쟁이라는 생각에 고착되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노동조합들은, 자본이 노동에 어떤 침해를 가하려 하는지를 감시하고 나쁜 정책 도입에 저항하기 위한 조직, 실제적 방어조직/거래조직으로 고착되어 간다. 노동조합 투쟁뿐만 아니라 생태투쟁이나 농민투쟁 등도 그러하다. 실제로 새로운 삶에 대한 전망을 갖지 못할 때에는 현존하는 것의 방어가 최선의 것으로 된다. 방어투쟁의 어려움과 치열함은 그것이 결국 자본주의적 삶의 한 단면을 방어하는 것이라는 사실조차 잊게 만든다. 정리해고 없는 세상도, 2인승무제의 세상도, 미국산 소 대신에 호주산이 들어오는 세상도, 민영화되지 않은 국영-공영의 세상도 노동의 착취에 기초한 적대적 세계라는 사실은 방어투쟁이 치열하고 진지하고 곤란하면 그럴수록 깊이 감추어진다. 자본의 공세를 막아낸 어떤 지점에서 노동 사이에는 '우리가 승리했다'는 감정이 확대된다. 방어투쟁에서 승리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덜 나쁜 자본관계를 방어하는 것에서 승리한 것뿐이다. 이 과정에서 실제로 승리하는 것은 자본의 변증법이다.  덜 나쁜 자본관계와 더 나쁜 자본관계 사이의 변증법. 노동은 그 변증법의 회로, 프레임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맴돌게 된다.

생산수단의 절약(기계화, 발명, 자원의 공동사용 등)이 (아무리 자본의 힘으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노동의 내재적 힘이라는 사실에 대한 맑스의 강조는 모든 투쟁이 노동의 내재적 자율적 힘에 대한 인식과 확신 위에서 전개될 필요성을 암시한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것은 자본의 힘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이 실제로는 노동의 힘의 현상형태에 다름 아니라는 점을 인식할 때에 투쟁은 노동의 그 내재적이고 자율적인 힘에 대한 조직화라는 관점 하에서 전개될 수 있게 된다. 보편노동의 산물인 기계류, 노동의 직접적 공동화(작업장, 기계류, 조명 등을 사회적으로 함께 사용하는 결합된 노동활동)로서의 공동노동은 노동에 내재하는 사회적 힘이 발현되는 방식이다. 이것은 노동의 내재적 사회성이 모순적이고 적대적인 방식으로 전개되는 방식이다. 이것들이 노동의 내재적 힘의 발현인 한에서 노동은 이 모든 것을 스스로 사회적으로 운영하고 관리할 수 있다. 기계를 얼마나 어떻게 누가 발전시킬 것인가, 과학과 기술을 생산에 어느 정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노동들 사이의 협력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등의 문제가 축적에 종속된 자본필연성에 의해 응답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필요성에 따라 응답될 것이다.

생태주의의 어떤 조류는 자본주의적 경험에 대한 반사행동 혹은 그것에 대한 공포에서 사유를 시작한다. 그래서 기계류에 대한 거부, 산업 자체에 대한 거부, 심지어 인간 자체에 대한 거부로까지 나아가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유는 노동의 사회적 힘이 자본의 힘으로 나타나는 현실에 대한 공포와 거부 때문에 노동의 내재적으로 사회적인 힘에 대한 거부로까지 나아가는 전형적인 경우이다. 이러한 사유는 자본에 대한 부정과 투쟁으로 조직될 때조차 자본의 필연성에 얽매여 있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자본의 공세에 대한 대응, 방어에서 싸움을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에 머무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투쟁이 방어에 머무르는 것은 승리의 순간에도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다. 투쟁은 방어를 넘어 나아갈 수 있는 상상력을 키우고 그 상상력을 물질화할 개체성과 집단성을 준비해 나가야 한다. 과거에 이것은 전위당들에 의해 분업적으로 담당되었던 역할이다. 전위들은 더 이상 투쟁을 방어 너머로 이끌 힘을 갖지 않는다.  아니 전위가 있다면 투쟁하는 다중들 모두이다. 다중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중들의 연합체가 투쟁을 방어 너머로 투사하고 그렇게 상상된 기획 속에서 투쟁에 참가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노력은, 자본의 힘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이 실제로는 노동의 내재적 힘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 위에서만 지속적으로 그리고 멀리까지 추진될 수 있을 것이다.
2010/07/21 08:37 2010/07/21 08:37
이 편의 문제의식은 엥겔스의 서문에 상술된 바처럼 '노동에 따른 가치생산'(가치법칙)과 '투하자본에 따른 가치취득'(평균이윤율)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두어져 있다. 이 괴리, 요컨데 평균이윤(율)의 정립에 따른 가치법칙의 은폐는 실제적인 것으로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특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가치는 직접적 생산과정에서 v의 가변, 즉 v가 불불의 가치인 s를 창출함으로써 비로소 생산된다. 하지만 전체로서의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은 생산과정 외에 유통과정을 경유한다. 생산과정을 거치고 나서 나타난 생산물의 가치 C는 자본가의 관리 하에서 유통되면서 개별자본들 사이의 경쟁의 과정에 들어가고 생산과정에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취한다. 이것이 생산담당자들의 의식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생산물의 가치에는 자본가가 비용을 들이지 않은 가치, 즉 노동자가 비용을 들인 가치가 들어 있고 이것이 잉여가치이다. 하지만 자본가는 자신이 비용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비용가격 K에서 제한다. 즉 생산물의 가치 C(=c+v+s) 중에서 c+v만이 비용가격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여기서 상품의 자본가적 비용가격과 상품의 가치, 즉 실제적 비용가격 사이의 괴리가 발생한다.

자본가의 시선에는 노동력의 가치인 임금이 노동의 가치(또는 가격)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실제로는 총노동시간(노동시간 전체)과 노동력의 가치(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 사이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잉여가치의 원천이 미궁에 빠진다.

가치생산과정에는 불변자본의 경우, 그 일부만이 가담하는데 노동과정에는 불변자본 전체가 소재적으로 가담한다. 그래서 비용가격의 형성에서는 불변자본의 일부만이 가담하지만 잉여가치 생산에는 불변자본 전체가 가변자본 전체와 더불어 함께 기여하는 듯한 환상이 발생한다.(39) 이렇게 잉여가치가 총투하자본의 산물이라고 생각될 때 잉여가치는 이윤이라는 환상적 형태를 취한다. 이로써 상품가치C=c+v+s에서 C=비용가격k+이윤p라는 공식으로의 전형이 이루어진다.

자본주의적 경쟁의 가능성은 상품의 가치와 비용가격 사이의 차이(잉여가치 크기)에서 주어진다. 이 차이 한도 내에서는 자본가는 상품을 그 가치 이하로 판매하면서도 이윤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41) 자본가에게는 잉여가치가 판매과정에서 비용가격 이상의 가격을 받을 때 생겨나는 양도이윤으로 나타난다.(41)

이윤은 잉여가치의 자본주의적 재생산과정에서의 현상형태이다(53). 잉여가치에서는 노동과 자본의 관계가 나타남에 반해 이윤에는 자본(비용가격) 대 자본(이윤)의 관계가 표현된다.

잉여가치율s'=s/v이다. 고로 s=s'v와 같다. 이윤율p'은 s/P=s/c+v이다. 이것은 p'=s'v/C=s'v/c+v라고도 쓸 수 있다. 여기서 불변자본c는 자신이 가진 가치 때문에 중요하지 그것의 소재량은 가치형성과 이윤율에 무의미하다. 하지만 가변자본v는 그것에 대상화된 노동이 아니라 그것이 움직일 수 있는 총노동(이것은 가변자본에 표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이 이윤율에 의미를 갖는다. 총노동과 가변자본에 표현되는 지불노동 사이의 차이가 중요한 것이다.58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 가변자본은, 그 자체의 가치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얼마만큼의 불불노동을 움직일 수 있는가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하고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것 외에 간접적으로 움직이는 것까지 고려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직접고용노동, 직접고용노동의 필요노동이상의 연장, 비고용노동의 무상이용 등].

회전과 이윤율의 관계는 년간이윤율공식 p'=s'n*v/C 공식에서 살펴볼 수 있다.

기계류와 사회적 노동의 관계에 대해서는 3권 1편 5장이 중요하다. 불변자본의 절약은 불변자본이 사회적 노동 혹은 사회적으로 결합된 노동의 조건들로 기능할 때 가능하다. 기계의 개량, 폐물의 이용, 작업장 및 창고, 난방비 및 조명비 등의 절약도 사회적 노동, 결합노동, 집단적 노동에서 가능해진다.(92전후)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의 생산분야에서의 노동생산성의 발전이 다른 산업분야에서의 생산수단의 가치를 감소시켜 이윤율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자연과학이나 정신적 생산영역에서으 진보가 철, 기계, 건설 등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그것이 농업, 섬유공업에서의 생산수단의 가치를 감소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오늘날 비물질노동은 여타 분야에서의 생산수단 가치를 감소시키고 이윤율을 상승시키는 기능을 할 수 있다.(93) [다른 생산분야, 다른 작업장에서의 노동생산성 향상 외에 작업장 밖의 삶에서의 생산성 향상도 불변자본 가치를 하락시키는 요인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들은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자기에 외적인 힘으로 경험하기 때문에 이에 무관심하지만 노동자 자신의 공장[협동조합공장]에서는 전혀 다르다(97). 노동자가 경영하는 사회를 염두에 둔다면  각 분야, 부문의 노동의 사회화는 노동자가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이것은 분산을 원리화하는 생태주의 경향과는 대립하는 측면을 갖는다.]

자본주의에서 불변자본 절약은 노동자의 생산조건과 건강을 악화시킨다.(98) 또한 가변자본도 최대한 절약하려는 경향이 발생한다. 기계화를 통한 노동의 직접적 사용의 축소가 그것이다. 그런데 직접사용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불이 중요한 것이다. 지불하는 노동의 사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기계화, 무상노동의 활용 등이 늘어나는 것이다.

고정자본의 절약은 1)노동조건들의 대규모 사용 2)공동적인 생산적 소비에서 이루어지며 3)결합된 노동자의 경험에 의해 그 절약 방식의 발견과 증명이 이루어진다.(119) 여기서 보편적 노동과 공동노동을 구별해야 한다. 보편적 노동은 온갖 과학적 노동, 온갖 발견과 발명을 가리친다. 이 노동은 부분적으로는 현재의 살아 있는 사람들의 협업에 달려 있을 뿐 아니라 부분적으로 과거의 죽은 사람들의 노동의 이용하는 것에도 달려 있다. 그러나 공동노동은 개인들의 직접적 협업을 가리킨다.(119)

생산수단의 절약이 노동의 내재적 힘인데 자본의 힘으로 나타난다는 맑스의 생각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불변자본 절약의 첫째 요소는 "생산수단이 결합된 노동자의 공동의 생산수단으로서 기능하고 사용되는 것의 결과"(96)이다. 둘째는 자본에게 생사수단을 제공해 주는 부문들에서 노동생산성 발전의 결과이다. 이것이 오히려 노동자를 희생시키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노동자는 이러한 절약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거부적이다. 이 무관심이나 거부는 자연스럽지만, 노동자의 투쟁 대안이 이 무관심과 거부를 출발점으로 삼을 수는 없다. 투쟁의 구체적 전술이 어떻게 나타나건 대안의 추구는 생산수단의 절약(기계 및 작업장의 공동사용, 발동과 전동의 절약, 폐물의 이용, 발명에 의한 절약 등)이 노동의 내재적 힘이라는 데에 대한 인식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부르주아는 유통과정에서 생산과정을 잊어버리고 상품가치의 실현을 잉여가치의 생성이라고 혼동한다. 또 노동 착취를 잊고 나면 원료가격의 높낮이, 원료에 대한 전문지식 여부, 기계의 생산성과 적합성과 저렴성 여부, 각 단계의 생산과정의 조직화의 효율성, 원료의 낭비 여부, 경영과 감독의 효율성 등등에 따라 이윤율이 달라지기 때문에 부르주아는 이윤이 노동착취에서 발생하기보다 경영수완 등 자신의 개인적 행동에서 이윤이 나오게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161)


2010/07/20 14:53 2010/07/20 14:53
푸코는  철학적 실천이 담론으로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서의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현실태를 파악하는 것과 더불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실태의 되풀이를 멈추게 하는 것이 철학적 실천의 과제이다. 그가 보기에  현실태를 파악하는 두 방향이 있다. 하나는 고고학적 방향으로서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장소인 사유체계의 현실태를 파악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계보학적 방향으로서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체계의 현실태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현실태를 넘어서는 것,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푸코에게서 윤리의 문제의식이 등장하는 곳이 이곳이다. 푸코에게서 해방은 생산으로 나타난다. 억압/해방의 이원가설은 두 현실태 중의 어느 하나에 대한 인정을 초래하게 되며 현실태를 극복할 수 있도록 만들지 못한다. 이 이원가설은 생산이라는 사선을 통해서 해체될 수 있다.  새로운 자기의 생산, 이것이 해방의 방법이다. 자기의 이 새로운 생산이 윤리적일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배려(souci)이다. 배려는 담론적 실천, 권력의 행사에 내재해야 하며 타자와 자기의 관계, 자기와 자기의 관계 모두에  관철되어야 한다. 그럴 때 자기의 생산은 윤리적으로 된다. 예술가는 예술을 통해 작품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자기자신을 변형하고 새롭게 생산한다. 철학자는 철학적 실천을 통해 자기자신을 변형하고 새롭게 생산한다.  그리하여 예술가나 철학자는 자신의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든다.
2010/07/18 11:38 2010/07/18 11:38

국제상황주의자(SI)에 관하여

Posted at 2010/07/17 13:51// Posted in 쓰기(skribi)/시학_P
1. 현재의 문화상황
인터넷
인간은 경쟁하는 동물이다:
-네이버 http://www.naver.com/

권태는 운명이다.
소비하라, 소비하라, 소비하라
텔레비전 (편성표)

저항은 악마의 짓이다.
신문
-조선일보

2. 저항문화의 단면들
참세상 http://www.newscham.net/
EduFactory http://www.edu-factory.org/edu15/index ··· rontpage
Not Bored http://www.notbored.org/index1.html

3. SI 이미지

상황주의 이전의 이미지
결코 노동하지 말라
http://i-situationniste.blogspot.com/

상황주의 관련 이미지
http://www.google.co.kr/imglanding?q=situationist%20international&imgurl=http://users.fba.up.pt/~mpac/C2071812681/E20070317172940/Media/sitoon.jpg&imgrefurl=http://users.fba.up.pt/~mpac/C2071812681/E20070317172940/index.html&usg=__nmiDBw46enmqBWmCG1b-YEgrBkc=&h=277&w=400&sz=33&hl=ko&um=1&itbs=1&tbnid=mzccG015rIBn1M:&tbnh=86&tbnw=124&prev=/images%3Fq%3Dsituationist%2Binternational%26um%3D1%26hl%3Dko%26newwindow%3D1%26client%3Dfirefox-a%26hs%3DO1I%26sa%3DX%26rls%3Dorg.mozilla:en-US:official%26tbs%3Disch:1&um=1&newwindow=1&client=firefox-a&hs=O1I&sa=X&rls=org.mozilla:en-US:official&tbs=isch:1&start=0#tbnid=-_0AZOOcVRVMEM&start=43

4. 1980년대 혁명운동의 상황주의적 요소
진보적 사회를 향한 금지된 열정(월간『노동해방문학』의 탄생(조정환, 대산문화 7호, 2002년 11월 30일)
http://www.daesan.org/webzine_read.htm ··· 3Bho%3D4

5. 한국어로 번역된 SI 이론서
스펙타클의 사회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 ··· 87057011
일상생활의 혁명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 ··· 92325010

6. SI 영화
기 드보르 영화모음 http://www.ubu.com/film/debord.html
그 중에서 스펙타클의 사회(영화) http://www.ubu.com/film/debord_spectacle.html
기 드보르의 영화 스크립트 http://www.bopsecrets.org/SI/debord.films/index.htm


7. SI 관련 국내글
권태’를 깨고 ‘열정의 삶’을 창조하라(조정환) 경향신문 2006년 10월 27일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 ··· 3D900308 
권태는 반혁명적이다(이승우), 진보평론 26호
http://jbreview.jinbo.net/maynews/read ··· no%3D566
21세기의 촛불, 상황주의자의 부활인가(이성혁), 중앙대학원신문, 2008년 9월
http://www.cauon.net/news/articleView.html?idxno=14945

8. SI 링크
Situationiste Interantionale 12권 기사
http://i-situationniste.blogspot.com/2 ··· o-1.html

Guy Debord archive
The Situationists on libcom.org/thought
Situationist International archive
Guy Debord search results on libcom.org
  • In Short - the Situs in short in their own words
  • Questionnaire - An self-interview with, and by, the SI
  • The Blind Men and the Elephant - Misconceptions about the SI
  • Bureau of Public Secrets - big Situationist resource site
  • Notbored.org - Situationist resource site
  • Nothingness.org - Anarchist and Situationist resource
  • Situationist International Archive - Big pre-, post- and Situationist archive
  • The Revolution of Everyday Life - Book by Raoul Vaneigem about Situationist ideas
  • How to talk like a Situationist


  • 9. 상황주의자의 개입
    교통문제에 대한 상황주의자들의 입장

    10. 상황주의자들에 대한 비판
    개인적이며 집단을 형성하지 못한다는 견해(Against Situationism)
    http://varnelis.net/blog/against_situationism

    2010/07/17 13:51 2010/07/17 13:51
    앞의 인용글에서홀러웨이는 '두 개의 성'을 우리의 일상적 행위(do/doing)의  역사적 산물로서 볼 때에 그것을 멈출 능력, 그것의 한계를 넘어설 능력이 우리에게 있음도 자각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이, 그 소재까지 그렇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그것의 사회적 형태는 우리의 창조행위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맑스는 노동을 '형식창조적 불'이라고 불렀는데, 이 때의 노동은 행위의 소외된 형태라는 데 초점이 있기보다 행위의 다른 이름이라는 데 초점이 있다. 행위를 삶의 형식들을 창조하는 불이라고 이해하면, '두 개의 성'이라는 형태가 우리의 행위의 산물로 뚜렷이 나타난다. 남성과 여성이 있고 그 외에는 없다는 인식은 마치 자연처럼, 자연적 본성에 대한 식별인 것처럼, 어떤 다른 가능성도 주어지지 않는 영구불변의 실체의 지각인 것처럼 기능한다. 이 지각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경쟁, 전쟁, 착취의 관계인 자본관계를 자연의 산물이자 다른 관계의 가능성이 없는 영구불변한 관계로 파악하는 것보다 더 실체적으로 기능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비판가나 사회활동가들도 두 개의 성에 대해서만은 적응적이거나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곤 하는 것이다.

    영화 《언페이스풀Unfaithful》은 '행복했던 가정이 순간적 유혹과 불륜으로 인해 붕괴한다'는 일종의 상투적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표면적 메시지는 '조심하라, 조심하라, 조심하라'는 도덕적 경고이다. 하지만 관객이 이야기의 상투성과 영화구성의 박진감 사이의 긴장 속에서 많은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여지도 열려 있다. 연출자(에드리안 라인)는 두 개의 성 너머, 혹은 두 개의 성 외부의 가능성을 '위험' 이외의 방식으로는 전혀 보여주지 않지만 사태가 충분히 전개되고 자수(경찰서)와 도주(멕시코) 사이에 망연히 서 있는 어둠 속의 차를 통해 관객에게 문제에 대한 사유를 재촉한다.(이 영화가 끌로드 샤브롤 감독의 1969년 작의 리메이크라는 점은 유의할 만하다.)

    영화가 남겨 놓는 문제를 계속 생각해 보자. '두 개의 성'은 결코 단순한 지각, 인식형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혼인제도, 풀어 말해 결혼, 출산, 양육, 교육관리, 성생활, 공동재산관리, 건강관리, 문화생활, 죽음관리, 그리고 상속에 이르는 일련의 법적 제도적 문화적 과정 자체이다. 우리 시대에 '행복'은 바로 이 법적 제도적 문화적 과정이 정상성의 궤도를 따라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행복은 제도적 안전, 절차적 순조, 물량적 확장 개념으로 이해된다. 남편-아내-아이의 가족삼각형이 영화에 등장하는 행복의 삼각형이며 그 바깥은 이 삼각형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서만 존재한다. 에드워드 서머(리차드 기어) 는 가정에 오면 지극히 자상한 아빠, 남편이지만 회사의 테이블에서는 타자에게 소리치고 다른 기업측과 만났다고 직원을 일거에 해고하는 잔인한 사장이다. 두 개의 성 논리에 기초한 가부장적 일부일처제 가족은 세계를 폐쇄된 삼각형들의 더미로 만들어 놓는다. 삼각형들 사이의 담, 울타리, 방화벽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행복은 협소한 폐쇄공간 속에 갇히고 그것의 반복은 권태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바깥과 격절된 가족이라는 배는 세계를 자신의 행복을 위태롭게 할 풍랑과 파도로서 대면하게 된다. 영화에서 그것은 트위스터의 세찬 바람으로 나타난다.

    두 개의 성은 인식이나 제도일 뿐만 아니라 공간의 물질적 조직, 조직된 물질이다. 일부일처제 가족의 물질공간은 아파트로 상징될 수 있다. 공동의 대지 위에 살면서도 철저히 격리된 생활을 유지하도록 조직된 공간이 아파트이다. 이 공간구조는 아빠가 운전을 하고 엄마가 조수석에 앉고 뒷좌석에 자녀들이 앉게 되어 있는 승용차에 그대로 복제되어 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덮고 쓸어버리는 회색의 아스팔트 도로망을 가져온다. 아파트에서 아스팔트로 이어지는 물질적으로 조직된 공간은 가족삼각형을 보편화하는 질서이다. 이것은 우리의 깊은 무의식을 일상적으로 재구성하는 프레임이다.

    가족삼각형의 시간은 어떻까? 아이는 스물네시간 집에 갇힌다. 학교는 이 감금을 대신할 뿐이다. 엄마는 시간에 맞춰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또 데리고 오기를 반복한다. 행복한 가정의 엄마는 아이를 잘 보호하는 간수(看囚)이다. 아내는 아이를 '보살'피고 요리를 하며 남편을 기다리는 가사노동에 고착된다. 남편은 노동에 고착된다. 사무실의 노동은 가정으로까지 침투한다. 이 시간의 반복은 권태를 체제화한다. 권태는 지루한 안전, 폐쇄된 행복의 되풀이이다. 그것은 잘 조직된 안전이다.

    가족삼각형은 성기집착증의 원천이다. 에로스는 가족삼각형 속에서 성기화된다. 홀러웨이가 설득력있게 말했듯이 자본주의는 섹슈얼리티를 생식과 출산, 즉 노동력 재생산으로 환원했고 이것은 섹슈얼리티를 성기화하는 제도적 조건이 된다. 에로스의 성기화는 성기적이지 않은 에로스에 대한 평가절하와 말소를 가져온다. 다른 한편 그것은 성기적 에로스의 특권화와 그것에 대한 집착, 편집증을 가져온다. 다른 모든 에로스적 현상들은 성기적 에로스로 통하는 문으로만 인식된다. 그리고 성기적 에로스는 가족프레임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도록 규정된다. 법과 국가권력, 교육제도, 교회, 언론방송은 이 규정을 나날이 재생산하는 물리적 힘들로 기능한다. 가족 외부에서의 성기적 에로스 행위는 교육에서는 불륜으로 언론방송에서는 사회문제로 법에서는 범죄로 국가에서는 통치의 대상인 기강해이와 무질서로 취급된다. 성기적 에로스의 특권화와 가족 내 제한, 가족 외 성기적 에로스의 터부화는 에로스를 관음증과 노출증의 변증법 속에 가두고 비아그라와 포르노, 성폭력을 증식시키는 비옥한 토양을 만든다. 다시 말해 우리들의 법적 윤리적 정치적 문화적 실천이자 일상적 행위로서의 가족구성, 가족재생산, 행복한 가정에 대한 추구가 불륜, 성폭력과 성범죄, 비아그라, 포르노, 심지어 살인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하고 증식시킨다. 성기집착적 에로스는 소외된 에로스이다. 영화에서 아내는 가족이라는 성기집착제도 바깥의 풍랑에 휩쓸린다. 하지만 그녀가 실행하는 것은 다른 곳에서의 성기집착행위이다. 그녀는 두 개의 성기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과 그것이 실제로는 불가능하다는 엄연한 사실, 즉 두 개의 가족을 동시에 가질 수 없다는 현실 사이에서 현기증을 느낀다.

    남편의 철저한 성기집착적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엄마가 아이를 보살피는 것처럼, 아빠는 가정을 보살핀다. 가족 밖에서의 잔인한 경쟁, 무자비한 해고, 과도한 노동이 가정을 보살피는 남편의 방법이다. 아내의 '불륜'을 낌새챈 남편은 미행을 청부하고 출장을 빙자하여 아내를 덫에 빠뜨린다. 사태를 확인한 남편은 아내의 정부인 폴 마텔을 찾아가 우발적으로 살해한다. 현장의 지문을 지우고 시체를 쓰레기장에 버리고 피를 씻은 후 시간에 너무 늦지 않게 아이의 연극무대에 참가한다. 이 모든 것이 남편의 성기집착적 소유적 사랑의 정상적 현상형태이다. 그것은 타자를 짓밟고 해고하며 아내를 의심하고 소유적 사랑의 침해에 대해 살해로 보복하고 진상을 은폐하여 하나의 보편적 문제가 드러나지 않게 감추고 아이의 아버지로서 아내의 남편으로서의 '주어진',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계속하고자 하는 사회적 실천이고 행위이며 욕망이다. 이 욕망과 행위와 실천은 매일 모든 사람들에 의해 반복된다. 그리하여 두 개의 성 체제는 트위스터, 토네이도, 태풍, 지진과 같은 격렬한 동요에도 불구하고 오뚝이처럼 일어선다. 수 많은 혁명들이 자본주의에 타격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가 우리들의 욕망과 행위와 실천을 바탕으로 다시 자신을 복구했듯이 말이다.

    가족, 가정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두 개의 성 체제가 엄청나게 위험한 생명조직의 형식이라는 것, 폭력과 살해의 욕망을 키우는 편집증, 집착증의 체제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무수한 에로스들, n개의 성들의 잠재력을, 법과 제도와 폭력을 통해, 두 개의 성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우리의 부단한 욕망과 행위와 실천의 산물임도 분명하다. 그것은 노동체제, 자본주의와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체제이다. 두 개의 성 체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이 곧장 범죄들로 연결되곤 하는 시대에 어떻게 이 위험한 체제를 해체하고 성의 무한성을, n개의 성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녹색 불빛으로 어둠 속에 빛나는 경찰(police)이야말로 이 두 개의 성 체제의 파수꾼임을 상기한다면, 멕시코로 도주하여 해변에 작은 별장을 짓고 세 사람만의 가족삼각형을 유지하는 것이 이미 붕괴된 두 개의 성 체제의 환상을 지속하기 위한 인위적 조작에 다름 아님을 상기한다면 길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두 개의 성 체제를 근본적으로 질문하는 것, 혼인제도와 일부일처제 가족을 근본에서부터 따져 묻는것, 두 개의 성 체제를 재생산하는 행위들 앞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것, 에로스에서의 성기주의에 맞서 싸우는 것, 가족적 행복과는 다른 행복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 등등. 이 모색들의 진전은 결국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두 개의 성 체제의 물리적 형식들, 즉 아파트, 승용차, 아스팔트, 텔레비전, 학교, 교회, 예식장, 국가 등의 변혁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010/07/17 09:55 2010/07/17 09:55

    다음은 머지 않아 갈무리에서 출간될 존 홀러웨이의 『크랙 캐피탈리즘』(Crack Capitalism)의 매우 고무적인 일절(16장의 일부)을 번역한 것(초고)이다. 이 구절은 노동의 탄생과 두 개의 성 담론의 표준화 사이의 밀접한 연관을 살피면서 성이 사회적 실천, 우리의 행위의 산물임을 밝힌다.-아멜라노

    새로운 성적 정상성은 물론 노동력을 풍부하게 공급할 생식을 촉진하는 일과 연관되었다.(Federici 2004, 85ff.) 그러나 그것도 노동자의 창출과정의 일부였고 추상노동의 불구적 인격화의 일부였다. 노동자의 창출은 쾌락원칙의 현실원칙에의 필수적인 종속을 의미했다. 나아가 그것은,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도 삶의 일부인 현실원칙에의 종속뿐만 아니라 노동에 기초한 사회와 불가분한 (마르쿠제가 명명했던) 강화된 현실원칙 혹은 “수행원칙”에의 종속을 의미했다. “쾌락원칙은, 그것이 [단순히] 문명의 진보를 방해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지배와 노고를 영속화하는 문명의 진보를 방해하기 때문에 폐위된다.”(Marcuse 1956/1998, 40)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성적 도착 [담론]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그 행동들의 특수한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쾌락을 섹스의 종말이라고, 또 이것이 노동자의 창출과 양립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는 것이다. “섹슈얼리티를 유용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채택하는 사회에 반하여, 도착들은 섹슈얼리티를 그 자체 목적으로 삼는다. 그것들은 그들 자신을 수행원칙의 지배 외부에 놓으며 그 원칙의 기반에 도전한다.”(Marcuse 1956/1998, 50)

    성의 생식으로의 정상화[표준화]는 필연적으로 섹슈얼리티의 성기화를 의미한다. 섹스는 잠재적으로 생식에 이르는 성기접촉으로 정의된다. 섹슈얼리티는, 원래 다형적이고 신체 전체에 확산되어 있었는데 이제 성기들에 집중된다. “신체의 탈성화”가 있다. “리비도는 신체의 일부에 집중되고 신체의 나머지 부분은 노동 도구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해방된다.”(Marcuse 1956/1998, 48)

    섹슈얼리티의 성기화는 성적 동질이형론(dimorphism, 同種二形論)으로, 즉 두 개의 성이, 오직 두 개의 성만이 있다는 생각으로 이끈다. 만약 섹슈얼리티가 다형적 쾌감으로, 예컨대 피부 대 피부의 접촉으로 사유되고 (또 향유된다면), 사람들이 두 개의 성으로 나누어지는 것으로 생각할 아무런 이유도 없을 것이다.인간의 신체를 정확히 두 개의 범주로, 더도 덜도 아닌 두 개로 해석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보면 신체의 성적 영역들에 대한 지각을 재생산 활동에 기능적인 영역으로 환원하는 것의 효과이다. 재생산과 무관한 신체 영역들의 성적 반응성은 부정되고 또 금기시된다. 이 ‘탈성화된’ 신체 영역들도 또한 신체의 성적 구분과는 무관한 것으로 된다. ‘두 개의 성’이라는 개념, 하나의 성이 있고 그와 다른 성이 있다는 개념은 그러므로 사회적 규범으로서의 이성애의 효과이다. 근대 이전의 유럽 사회에서 섹슈얼리티는 이성애와 동성애로 명확히 양분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모든 사람은 이성애와 더불어 동성애를 행하는 것으로 가정되었다(아니 오히려 의심되었다). 동성애는 다소간 엄혹하게 박해받거나 처벌되었다. 그렇지만 19세기 이래로 동성애 행위들은 자동적으로, 더 이상 유죄의 동성애 (아니 오히려 ‘남색’) 행위를 범하는 인간은 아니지만, ‘한 사람의 동성애자’, 즉 특수한 인종의 구성원인 어떤 행위자의 동성애적 성질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담론은 동성애 행위가 처벌될 필요가 있는가 없는가 어떻게 처벌되어야 하는가라는 것에서부터 다른 종으로서의 동성애 그 자체가 박해되어야 하는가 아닌가, 정신과 치료에 맡겨져야 하는가 아닌가, 관용되어야 하는가 아닌가로 이동한다.(Stoetzler 2009, 165-166)

    이것은, 여성과 남성이 초역사적 범주로서가 아니라 가치, 화폐 혹은 국가와 같은 사회관계의 특유하게 자본주의적인 형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성과 여성(그리고 실제로 동성애와 이성애)는 동일화[정체화]이고 동일성 사회의 측면들이며 추상노동의 수행자인 노동자의 창출 속에 포함되는 불구화의 일부이다. 그것은 맞서 싸워야할 구획이다.

    노동은 행위 및 삶-활동의 세계로부터 노동의 추상, 분리이다. 우리의 삶-활동의 이러한 파편화는 우리의 삶의 모든 측면에서의 파편화이다. 섹슈얼리티의 전체로서의 신체로부터의 분리와 그것의 성기로의 집중은 또 역사적으로 노동의 추상으로 부과되었고 노동을 위한 기계로서의 신체의 창출에 근본적으로 기여했다. 그것은 추상 혹은 분리라는 일반적 과정의, 제한, 구획, 동일화의 과정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특수한 지배유형들은 우리에게 우연히 발생하는 무엇도, 그들(남자들, 자본가들 혹은 그 누구든)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무엇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우리의 활동을 통해 그리고 그것이 조직되는 방식을 통해 우리가 창출하는 지배의 유형들이다. 이것이 대인적ad hominem(혹은 여성적인ad mulierem, or 인간적인ad humanum) 비판의 중요성이다. 우리가 ‘우리가 어떻게 다르게 행할 것인가’의 문제를 열어제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의 행위에로, 우리 자신의 창조력으로 되돌림으로써만이다. 우리가 여성이거나 남성이거나, 동성애자이거나 이성애자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개인적 선택으로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으로서, 여성을 행하고 남성을 행하며 남성성과 여성성을 행하고 동성애와 이성애를 행한다. 이 사회적 실천은 실천의 복잡한 엮어짜임, 추상의 거미줄의 일부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핵심은 우리가 행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살해하고 있는 세계를 창조한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것을 창조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창조하기를 멈출 수도 있을 것이고 그 대신에 다른 무엇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10/07/16 21:42 2010/07/16 21:42
    1990년 이후의 노동운동사를 정리한 어떤 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관점이 제시되어 있다.

    1990년대는 동구와 소련의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시작되었다. 이 역사적 사태는 사회 운동을 목표로 하는 노동운동에 큰 후퇴를 가져왔다. 그 여파는 민중당이 주도하는 ‘노동운동 위기론’을 거쳐 ‘혁명’을 ‘진보’로 대체하는 과정을 낳았다. 이 과정에서 전노협은 어렵게 사수되었으나 그 운동에 내재하고 있던 혁명지향성은 청 산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청산은 미 제국주의가 주도하는 ‘민주화 이행 전략’에 따라 김영삼 문민정권 아래서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시민권과 혁명을 거래하는 방식으로 전행되었다. 그러한 거래의 결과로 전노협이 청산되고 민주노총이 탄생했다. 그러나 그 거래조차 기만적이었다. 자본과 정권은 시민권은 거부하면서 노동유연화를 요구했다. 96~97 총파업을 통해 비로소 이런 시민권이 쟁취되었다. 그러나 노동유연화는 기본적 으로 양보했다. 민주노총은 노동해방 기치를 사회개혁 기치로 대체했다. 그러나 IMF 사태를 맞으면서 사회개혁 즉 민주개혁을 향한 공세는 조합원의 고용을 지키기 위한 수세로 뒤바뀌었다. 그로 인해 사회개혁에도 적극적이지 못하고 ‘전투적 경제주의’로 후퇴했다. 새 천년은 노동자와 노동운동에게는 장밋빛 환상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세계대공황을 향해 미끄러지고 있었다. 한국 노동운동은 이에 대한 인식이 없었고, 이에 대응하는 실천도 없었다. 오로지 시민권에 기초하여 대중투쟁을 의회정치로 대체하는 데 몰두했다. 이 시기에도 ‘민주화 이행’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노무현 두 정권은 제한적이지만 민주화 이행의 떡고물을 노동운동에 던져주고 있었고 노동운동은 정권의 신자유주의 편향에 대해 불평하면서도 그것이 던져주는 떡고물에 안주했다. 그 결과 노동운동에 진정한 위기가 왔다. 이 위기는 2005년부터 공공연하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위기에 대해 관료적 실리적 해법만을 쫓았다. 그리하여 노동운동의 위기는 더욱 깊어졌고 구제하기 어려운 지점에 도달했다. 노동조합운동만이 아니라 노동자정치운동도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민중의 기대가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의회정치 안에 매몰되어 실망을 안겨주었다. 게다가 자리를 둘러싸고 분열하여 좌절감까지 가져다주었다. 어려울수록 “기본에 충실하라”는 말이 있듯이 노동운동에도 기본이 매우 중요하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목적하는 바가 무엇이냐 라는 점이다. 노동자의 해방이냐 아니면 임금노예 상태 아래서의 처지의 개선이냐 라는 문제이다. 개량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본이 역사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 자본은 개량을 제공할 생각이 없다. 개량을 위해서도 혁명을 해야만 한다. 혁명을 하려면 많은 것을 내놓아야 하는데, 그처럼 많은 귀중한 것을 내놓으려면 그에 값하는 값진 목표가 있어야 한다.

    나는 이 분석이 함축하고 있는 개혁주의 비판에, 그리고 임금노예이기를 거부하는 노동자 해방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공감한다. 하지만 이 비판과 주장이 자리잡고 있는 역사분석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계급구성론의 결여이다.1 노동자, 노동계급은 분석에 앞서 이미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계급구성론이 누락되면 역사 분석은 분석가의 자의와 상황론에 맡겨지게 된다. '더 이상 낡은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식의 상황판단에 입각하여 전투주의에서 개혁주의로 나아가자는 주장도, 개혁주의의 발호를 제국주의의 전술효과로 바라보면서 배신이나 전향은 안 된다는 주장도 상황론적이고 자의적인 분석으로 된다. 중요한 것은 1990년대 이후에 계급구성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유물론적 역사적 방법으로 살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전환이 계급구성의 어떠한 변화와 연동되어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신자유주의는 단순히 제국주의의 전술로 이해될 수 없다. 대중노동자로부터 사회적 노동자로의 재구성에 대한 대응이 자본의 사회적 지구적 지배로서의 신자유주의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의 산포로 인하여 공장노동자는 더 이상 투쟁의 유일한 초점으로 기능할 수 없게 된다. 기업적 착취로부터 사회적 착취로의 이행, 공장에서 대도시로 계급갈등의 이행과정은 (정리해고를 매개로) 공장 노동자 주변에 착취당하는 비임금노동자, 해고자, 실업자를 양산하게 되고 그 결과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는 노동계급 내부의 일종의 특권-특혜집단(지대rent를 받는 노동자집단)으로 성격전환한다. 민주노총 내부에 관료주의가 성장하게 되는 것은 이런 조건 하에서다. 전투적 조합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활동이 부적절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계급 재구성과 연관된다.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 중심의 개혁주의는 지대 수령 노동자 집단의  상황추수적 실증주의적 정치노선이다. 그렇다고 혁명적 원칙의 '견결한' 고수론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계급재구성론이 누락될 때,  혁명적 원칙을 고수하려는 입장은 노동운동의 이러한 변화를 배신과 변절의 과정으로 이해하곤 한다. 그래서 그러한 입장은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 내부에서의 이데올로기 투쟁과 지도부 쟁탈 투쟁을 대안으로 사고하곤 한다. 그러나 혁명의 성격과 전망이 급속히 달라지고 있고 주체성의 구성 문제 역시 달라지고 있다는 점은 고려되지 않는다. 전 지구적 규모에서 사회적으로 산포되고 다양화되고 있는 노동계급과 공장을 넘어 대도시 수준에서만 총체적으로 사고될 수 있는 혁명의 비전을 갖추지 못할 때, 개혁주의 비판은 연목구어(緣木求魚), 즉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잡으려는 노력과 흡사한 것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혁명적 원칙은 계급재구성의 현실에 비추어 재구성되어야 한다.

    1. 계급구성론에 대해서는 조정환, 『아우또노미아』, 갈무리, 2003, 제3장 참조. [Back]
    2010/07/16 20:02 2010/07/16 20:02
    오늘 아침 한겨레신문은 상용'근로자'('근로자'는 '노동자'에 대한 보수적인 규정이다)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면서 그 원인을 비임금'근로자'층의 상용근로자로의 분해에서 찾고 있다.(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430554.html) 통계청의 주장에 의하면 상용근로자란 '임금근로자 가운데 고용 계약기간이 1년 이상인 경우'를 말한다. 임금근로자는 상용근로자 외에 고용기간이 한달 이상~1년 미만인 임시근로자, 고용기간이 한달 미만인 일용근로자로 분류된다. 그런데 통계청은 비임금근로자, 즉 비임금노동자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 것일까?

    비임금근로자에 해당하는 유형은 고용원이 있는 자영업자, 고용원이 없는 자영업자 및 무급가족종사자가 있습니다. 고용원이 있는 자영업자는 한사람 이상의 유급 고용원을 두고 사업을 경영하는 사람으로 사업규모에 상관없이 임금을 주는 종업원을 채용하고 있는 경우가 해당됩니다. 고용원이 없는 자영업자는 자기 책임하의 독립적인 형태로 일이 수행되며 유급종업원 없이 자기혼자 또는 무급가족종사자와 함께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장이라 하더라도 개인기업이면 고용원이 있는 자영업자 혹은 고용원이 없는 자영업자이나, 법인기업이면 임금근로자로 분류됩니다. 무급가족종사자는 자기가족(동일가구내)의 구성원이 경영하는 사업체에서 일정한 보수없이 적어도 주당 18시간 이상(정상근로시간의 1/3이상) 일한 사람을 말합니다. 동일가구내 가족이라도 일정한 봉급을 받은 경우는 임금근로자로 분류하며, 가구를 달리하여 가족 또는 친척의 사업체에서 무보수로 일한 경우는 무급가족종사자는 아니며, 대가를 받은 경우는 임금근로자로 분류합니다. (작성부서 : 통계청 사회통계국 고용통계팀)1

    임금을 받지 않고 노동하는 사람이 자영업자나 그의 가족에 불과할까? 가사노동을 담당하는 사람들, 어린이들, 노인들은 임금을 받지 않으면서 일한다. 또 웹상에서는 무수한 사람들이 정보생산 노동을 하면서도 임금을 받지 못한다. 군인들은 극히 적은 임금을 받으면서 일한다. 기타 등등. 통계는 참고할 수 있지만 진실과 혼동될 수는 없다.



    2010/07/16 11:31 2010/07/16 11:31
    『공통체』 5.2 에서 네그리와 하트는 케네의 경제표를 대체할 공통적인 것의 경제표를 제시한다. 케네의 경제표는 사용가치의 재생산을, 맑스의 재생산도식은 가치와 사용가치 모두의 재생산을 보여준다. 네그리와 하트는 공통적인 것의 경제표에서 투쟁의 재생산을 보여주려 한다. 여기에 해당 부분의 요약이 있다. -아멜라노


    1. 케네의 경제표는 사회전체의 통화교환을 지그재그 형태로 추적했다. 그는 사회의 부가 금이나 은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순생산물에 의해 정의됨을, 그리하여 농업이 유일하게 생산적 부문임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중농주의자인 케네가 보기에 잉여가치는 지대의 형태로 지주가 가져간다.

    2. 칼 맑스는 산업경제의 재생산에 대해 케네의 방법을 적용했다. 맑스는 토지가 아니라 노동이 자본주의 경제의 부의 원천임을 보여주었다. 여기에서 잉여가치는 주로 이윤의 형태로 자본가가 가져간다.

    3. 우리는 삶정치적 경제에서의 가치의 생산, 유통, 전유를 추적하는 경제표를 만들어야 한다. 오늘날은 농업이나 공업이 아니라 삶정치적 생산이 헤게모니적이다. 모든 산업들은 삶정치적으로 되며 공통적인 것의 경제표에 종속된다.

    4. 삶정치적 생산의 경제표는 두 가지 어려움에 직면한다. 첫째는 삶정치적 노동의 자율성은 표의 일관성을 위협한다. 자본은 여전이 삶정치적 노동에 의존하지만 삶정치적 노동의 자본에 대한 의존성은 점점 약화된다. 둘째 삶정치적 생산의 생산물은 척도를 거부하여 그것을 초과한다. 생산의 주체성이 삶정치적 가치 발생에 점점 중요하게 되면서 이 문제는 심화된다. 주체성은 사용가치지만 자율적으로 생산하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주체성은 교환가치지만 양화하기 불가능한 교환가치이다. 그래서 삶정치적 경제표는 다른 경제표여야 한다.

    5. 삶정치적 맥락에서 필요노동은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는 것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삶정치적 경제에서도 임금갈등은 존재하지만 임금관계가 그것을 봉합할 수 없다. 이것은 점점 공통적인 것을 둘러싼 투쟁으로 된다. 삶정치적 경제에서 사회적 재생산은 사적인 혹은 공적인 관리나 명령 외부에서 생각되어야 한다.

    6. 이제 잉여노동과 잉여가치를 자본에 의해 전유되는 사회적 협력의 형태들이자 공통적인 것의 요소들로 이해해야 한다. 잉여가치율은 노동자의 노동력이 아니라 사회적 노동력을 구성하는 생산의 공통적 힘에 대한 자본의 착취수준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7. 자본주의적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자본주의적 축적의 사적 성격 사이의 모순은 삶정치적 시대에 더욱 극단적으로 된다. 자본이 공통적인 것을 축적하면 할수록 그것의 생산성이 저지되기 때문이다.

    8. 자본은 점점 자율화되고 적대적으로 되어가는 사회적 노동력에 직면하면서 위기에 처한다. 자본에게는 자본주의적 통제를 유지하기 위한 두 가지 옵션이 있다. 전쟁인가 금융인가? 전쟁 옵션은 일방주의적 군사모험에서 대규모로 시도되었다. 보안조치, 감금, 사회적 감시 등. 그것은 자유, 소통, 상호작용이 필수적인 삶정치적 경제에서 생산성을 침식했다. 그것이 사업에 나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전 지구적 귀족들은 일방주의를 끝내는 데 조력했다. 금융 옵션은 더 효과적이다. 금융은 전 지구적 사회적 생산을 따라가면서 부를 추출하고 명령을 부과한다. 금융만이 삶정치적 노동의 유연성, 이동성, 불안정성을 감독하고 강제할 수 있었다. 복지지출은 삭감하면서 말이다. 금융의 관건은 생산과정 외부에 남아 있으면서 삶정치적 생산에 자율성을 주고 다만 그것으로부터 부를 추출하는 것이다.

    9. 삶정치적 경제표는 교환의 경제표가 아니라 투쟁의 표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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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정의

    삶정치적 노동의 자유의 방어

    사회적 삶의 방어

    민주주의의 방어

    내용

    노동에 대항하는 공통적인 것의 투쟁

    임금에 대항하는 공통적인 것의 투쟁

    자본에 대항하는 공통적인 것의 투쟁





    2010/07/14 08:49 2010/07/14 08:49
    1. 재생산표식은 특수한 자본형태로 귀착되는 M에서 출발하거나 P에서 출발하는 순환도식 대신 C에서 출발하는 순환도식(C'―M'―C--P--C)을 보여준다. 이것이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을 가치와 소재 모두에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M에서 M으로 순환하는 도식(M―C--P--C'―M')은 가치순환을, P에서 P로 순환하는 도식(P--C'―M'―C--P)은 소재순환을 보여주지만 그 양자를 동시에 보여주지는 못한다.(여기서 C는 상품)

    2. 아담스미스에서(V+S)와는 달리, 맑스에서 사회적 총자본은 C+V+S로 구성된다(여기서 C는 불변자본). 아담스미스는 불변자본C의 순환을 V+S로 다시 해소시켰다. 이것은 특정한 시간 속에서 전개되는 물적 순환을 관념적 순환으로 해소시키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의 재생산과정에서 C는 사용가치나 가치 모두에서 C로 재생산되어야지 V나 S로 재생산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C가 V나 S로 재생산된다면, 자본은 즉각 재생산을 멈출 수 밖에 없다.

    3. C+V+S의 균형적 재생산표는 그림과 같다. Share photos on twitter with Twitpic 단순재생산표는 맑스의 것이고 확대재생산표는 부하린의 것이다.

    4. 재생산표에서 균형은 전제되어 있다. 즉 재생산표는 균형의 가능조건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 균형적 재생산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균형은 경험적으로는 극히 예외적이고 우연적인 사태이다. 오히려 불균형이 정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생산표에서 자본주의의 균형성장이라는 경험적 결론을 도출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20세기 초 독일의 사회민주주의 조류와 오스트리아맑스주의(바우어, 엑슈타인, 힐퍼딩)는 재생산표에서 균형의 정상성을 읽고 비례관계=균형관계의 조절을 통해 자본주의가 무한성장할 수 있을 가능성을 도출했고,  나로드니키와의 논쟁 속에서 성장한 러시아의 합법맑스주의(스트루베, 불가코프, 투간-바라노프스키)는 후진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성장 가능성을 도출하려 했는데 이것은 맑스의 재생산표에 과도한 짐을 지우고, 또 균형의 가능조건의 문제를 현실적 균형으로 오해한 사례이다. 균형의 가능조건을 그린 재생산 도식은 불균형의 '현실'과 전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로자가 축적위기 혹은 축적한계라는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맑스 재생산표식의 균형이론이 인위적인 것이라고 비판한 것도 맑스의 재생산표에 과도한 짐을 지운 오류이다.

    5. 기술진보,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등 재생산표에서 추상된 현실요소들을 도입하자마자 재생산표의 균형가능조건은 사라진다. 재생산표가 보여주는 균형이 현실의 경험과 접근하는 시간이 있다면 기존의 기술적 기초 위에서 확장이 이루어지는 휴지점에서일 뿐이다(로스돌스키, 『마르크스 자본론의 형성·2』, 276)

    6. 3권에서 경쟁이 도입되고 기술진보를 통한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나 상대적 잉여가치의 증대와 같은 요소가 도입되면 균형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위기의 이미지가 나타난다. 재생산은 장애에 직면한다. 그러나 이것은 2권의 균형도식에서 논거를 끌어내었던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붕괴론적 혁명주의자들이 주장하듯 결코 붕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균형조건을 요구하는 현실의 문제제기이다.  균형론과 붕괴론은 2권과 3권을  서로 상이한 분석국면에 대한 서술로서 상보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양자를 대립시킨다는 점에서 합치한다. 로스돌스키에 따르면 레닌은 2권의 균형도식을 맑스 실현 이론의 최종점으로 고려하고 실현문제/시장문제를 부정한 점에서 (시장문제는 당시의 팽창하는 자본주의 러시아에서 현실적으로 문제로 제기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레닌의 이 부정은 설명력을 가졌다) 합법맑스주의 조류 및 오스트로맑스주의 조류와 같은 입장에 서 있고 이것이 로자의 축적위기론에 대한 거부를 가져온 조건이 되었으며 이 점에서는 잘못이지만 3권을 2권과 대립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옳다고 본다.

    7. 나로드니키인 다니엘슨과 독일의 혁명론자인 로자가 제기한 실현 문제는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극복 불가능한 조건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잉여가치가 추가적인 노동력을 고용하기 위해 사용되는 한에서 실현문제는 완화되거나 극복된다.

    8. 결국 자본주의의 객관적 운동 속에서 균형을 절대화하는 것은 그릇되다. 균형론자들도 근본적 시장 문제는 인정하지 않지만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정부성에 의한 균형 교란의 가능성은 인정한다.  이들은 무정부성을 계획으로 대체하면 교란현상으로서의 불균형이 균형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이 사회(민주)주의의 논리구조이다.

    9. 자본주의의 객관적 운동 속에서 불균형을 절대화하는 것 역시 그릇되다. 이것은 기약 없는 저 절대적 불균형의 시간을 기다리는 실천을 제시하게 된다.

    10. 레닌의 장점은 자본주의의 객관적 운동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주체성과 행동으로 시선을 옮기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의 주체성 이해는 내재적이지 않았고 외부적이었다. 문제는 자본주의의 객관적 운동 과정 속에서 주체성의 구성과 재구성의 내적 과정을 탐구하는 것이고 자본의 재생산과 별도로 혁명적 주체성의 재생산을 탐구하는 것이다. 즉 균형이 아니라 혁명의 가능조건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삶정치적 재생산표는 교환과 보전의 경제표가 아니라 투쟁과 공통되기의 재생산표여야 한다.

    2010/07/14 08:44 2010/07/14 08:44

    구조적 위치와 경향의 차이

    Posted at 2010/07/08 07:47// Posted in 쓰기(skribi)/정치_P
    홀러웨이는 『자본주의에 균열을 내자』(15장)에서 구조적 위치와 인격화의 관계에 대한 몇 가지 응답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생산과 정치의 관계를 사유하는 데 유익한 자극을 가한다.

    그래서 우리는 문제를 갖고 있다. 사람들이 각자 그들의 사회적 기능의 인격화된 세계에서 그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꾸기를 우리가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 만약 우리가 자본주의에 의해 발생된 역할 속에 가두어져 있다면, 우리는 그 역할들에 의해 형성된 사회관계들의 패턴을 깨뜨리기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 이것은 계급 문제 및 노동계급의 혁명적 성격 문제와 특별히 연관된다. 만약 우리가 노동계급을 (임금소득자, 잉여가치 생산자와 같은) 특정한 분류에 맞아떨어지는 사람들로 생각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그들을 내재적으로 제한된 존재로, 그들이 차지하는 사회적 위치의 인격화로, 특정한 사회적 관계들, 즉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담지자들로 취급하는 것일 것이다. 노동의 인격화로서의 노동자들이 어떻게 혁명적 계급을, 노동을 폐지할 계급을 구성할 수 있는가?
    이 딜렘마에는 세 가지의 간단한 대답이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는 않다. 첫째는 구조주의적 주장이다. 세계에 대한 구조주의적 개념은 사회를 이 성격마스크들의 상호작용으로, 사회관계의 이 담지자들의 구조적 적대로 본다.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그들을 만드는 바로 환원된다. 아니 오히려, 구조주의 관점에서 보면, 여기에는 어떠한 환원도 없다.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만드는 바대로 존재한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주체들읻. 노동계급은 추상노동의 변화하는 얼굴이며 자본주의적 조직의 변화하는 형식들에 의해 발생된 성격character이다. 그러므로 혁명의 유일한 가능성은, 사회적 페르소나[personae]의 의미에 변화를 가져오는, 전체 구조의 변화 속에 놓여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위기가,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 노동계급의 성격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노동계급은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를 폐지하는 자신의 역사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주장의 난점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내에서의 그들의 위치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로 이해되는 한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운동을 통해 어떻게 저 규정들로부터 단절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은 어려운 일로 남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응답, 즉 고전적 레닌주의의 주장은 훨씬 더 단도직입적이다. 그것도 여전히 노동자들 구조적 위치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로 본다. 노동계급은 그것의 이해(理解)와 의식에서 제한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노동이라는 성격 마스크 내부에 효과적으로 갇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혁명을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외부의 힘, 즉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자본주의의 페르소나에 갇히지 않는 집단의 개입에 의해서일 뿐이다. 달리 말해 우리는 혁명당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완전히 논리적인 해결책이다. 만약 노동자들이 추상노동의 인격화라면, 그들을 혁명적 세력으로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하게 가능한 길은 이 인격화에 종속되지 않은 집단의 지도력 하에서일 뿐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첫째로, 추상노동의 제약들로부터 단절한 이 혁명가들이 어디에서 나오는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며 둘째로, 그것은, 노동자들(“대중들”)을 혁명의 주체로보다는 객체로 이해하는, 위계적 혁명 관념이라는 것이다. 이 유형의 혁명의 역사적 경험은 고무적이지 않다.
    세 번째 응답은 간단히, 노동계급은 혁명적 계급이 아니라고 (혹은 더 이상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르쿠제의 인상적인 구절에서, 추상노동에 내재하는 인격화는, 노동자가 “일차원적 인간”이 되었다는 지점에까지 이르렀다. 일차원적 인간은 분명히 혁명을 수행할 수 없다. 그래서 근본적 사회변화의 행위자를 생각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곳을, 사회의 주변을 살피는 것이다. 이 견해는 최근의 반자본주의 투쟁에서 레닌주의적 입장보다 더 영향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는, 그것이, 노동자들을 그들의 계급적 페르소나와 동일시하는, 똑같은 출발점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자본주의 정치학에 열렬히 헌신하는 집단들 속에서조차 엘리뜨주의적이고 전위주의적인 입장이 재연되도록 할 수 있다.

    이 모든 응답들 속에서는, 사람들과, 그들이 사회 속에서 차지하는 구조적 위치 사이에 동일성이 있다는 생각이, 사람들이 실제로 그들의 성격마스크 속에 포섭된다는 생각이 다른 방식으로 가정되어 있다. 앞으로 나아갈 다른 유일한 길은 인견화의 힘을 의문시하는 것이고 마스크 착용자들의 얼굴에서 그 성격 마스크를 분리시키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스크 뒤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고, 그 마스크의 착용자를 마스크 내부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항하며-넘어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노동계급은, 그것이 노동계급으로서 자신 내부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항하며-넘어서 존재하는 정도만큼, 그것이 자신의 성격마스크를 내던지는 데 성공하는 정도만큼, 그것이 노동계급으로서의 그 자신의 실존에 맞서 싸우는 만큼, 혁명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구조적 위치로부터 정체성/동일성을 직접적으로 가져오는 사고법은 노동자에 대한 과장된 영웅화(노동계급은 객관적으로 보편적 혁명계급이다)를 가져오기도 했고 또 노동자에 대한 과장된 멸시(노동자는 일차원적화된 인간이다)를 가져오기도 했다. 홀러웨이가 지적하듯 20세기의 많은 진보이론들의 사유는 이 두 극점 사이의 어디엔가를 맴돌고 있다. 시각들에 대한 홀러웨이의 비판은 정당하다. 구조적 위치에서 직접적으로 동일성을 이끌어내는 동일성주의적 사고는 보수주의로 귀결된다. 홀러웨이는 내부에서 대항하고 넘어서는 WAB(within-against-beyond)의 관점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 역시도 유효하고 정당한 지표의 제시이다. 그런데 구조적 위치에 대한 대항력, 정체성주의를 넘어설 실제적 힘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것은 구조 밖에 있는가? 대항하고 넘어서야 한다는 의지에서 나오는가? 이 점에서 홀러웨이의 설명은 아직 모호하다. 비판이론의 어두움이 가시지 않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구조적 위치와 경향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경향은 구조를, 순환과 유통과 회전을 기우뚱하게 기울어지게하고 위기 속에 빠지게 만드는 힘이다. 홀러웨이는 엑스타시(바깥에-서기)의 정치학을 제시한다. 그런데 경향이야말로 엑스타시의 정치학의 근거이고 실재성이다. 경향은 내부에서 대항하고 넘어서는 힘의 실재성이다. 경향을 발견하는 일은 결코 구조적 위치, 구조적 관계를 발견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구조적 위치가 단절되고 변형되는 시간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 단절의 물적 인간적 시간적 계기들을 발견하는 일이다. 경향의 발견 없이도 대항하며-넘어서기가 강조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럴 때에는 어떻게 대항하며 어디로 넘어설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 홀러웨이는 외부성이 아니라 파열이 문제라고, 즉 행위는 노동과 외부성의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균열, 파열의 관계를 맺는다고 올바르게 주장한다. 그런데 이때 우리는 균열과 파열을 경향의 한 요소이자 특징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그것은 주의주의적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것의 생산, 창조의 힘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2010/07/08 07:47 2010/07/08 07:47
    1. 맑스는 『자본론』 2권에서 M-C[LP/MP]----P----C-M의 자본흐름을 꼼꼼이 분석한다. 그가 이 흐름에 대해 그토록 세밀한 분석을 하는 것은 자본 흐름의 체계를 이해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도 않고 정치경제학자들처럼 이 흐름의 선순환적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데 있지도 않다. 오히려 그 반대가 그 고찰의 목적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이 흐름의 내적 단절, 모순, 위기의 실재성과 가능성을 고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생산과정이 하나의 완결되고 최종적인 생산체제라는 인식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1)첫 유통과정인 M-C 과정이 지체되거나 단절되지 않고 성공하려면 MP, 즉 노동수단 및 원료 생산부문이 순조롭게 순환하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LP, 즉 노동력이 상품으로서 순조롭게 공급되어야 한다. 노동력이 시장에 상품으로 풍부히 공급되도록 만들기 위해서 자본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몸을 팔 수 밖에 없는 존재'를 생산하기 위한 내전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 또 M-C는 첫 유통시간으로서 이 시간의 지체, 지연은 증식의 가능성을 침식한다. 2)생산과정은 노동시간을 포함하는 생산시간을 요구하는데 이것이 길면 자본은 긴 회전시간으로 인해 고통받는다. 3)마침내 생산물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다시 자본에게는 공비로 다가오는 C-M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가치실현의 과정은 자본이 결사적으로 넘어서야할 도전으로 다가온다.  가치실현이 되었다해도 새로운 회전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각 생산요소들의 회전주기가 정합적으로 맞아떨어져야 하고, 이 맞어떨어짐이 예외인 한에서 화폐자본 형태로의 유리는 필수적이다. 신용제도가 이것의 한계를 넘어서는 데 도움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시간들에 위기 가능성이 내재한다. 회전시간은 유통시간과 생산시간으로 구성되며 생산시간은 노동시간과 비노동생산시간으로 구성되고 유통시간은 판매시간과 구매시간으로 구성된다. 위기는 이 시간대 어느 곳에서도 폭발할 수 있다.

    2. 『자본론』 2권은 1권의 물신주의장을 완성하고 3권의 위기론의 기초를 닦는다. 1)맑스는 자본주의에서 부가 자본과 소비재원으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소비재원이라는 표현은 자본 외적 영역을 설명하는 개념으로는 불충분해 보인다. 차라리 비자본이라는 포괄적 개념을 사용하면서 그것에 잉여가치증식을 위해 활동하지 않는 모든 존재를 포함시키는 것이 더 나을 것으로 생각된다. 비자본 중의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가 소비재원이다. 그것은 M-C[LP/MP]----P----C-M의 흐름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재원들이다. 자본가들과 노동자들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사용하는 소비품들은 자본이 아니다. 둘째로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으로 노동력은 자본이 아니다. 노동력이 상품으로 시장에 나가 있을 때조차 그것은 자본이 아니다. (상품과 상품자본은 구별되어야 한다.) 오직 노동력이 M-C[LP/MP]----P----C-M의 흐름 속에서 M에게 판매되어 생산과정에 LP로서 나타나게 될 때에만 노동력은 생산자본으로 전환된다. 노동력이 상품으로 시장에 전시되었다가 다른 노동자나 다른 자본가의 소비품으로 사용된다고 할 때에 그 노동력은 생산자본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원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2)이제 비자본이 아닌 자본을 다룰 차례이다. 유통과정에서 움직이는 자본을 유통자본이라고 부를 때 유통자본은 화폐자본과 상품자본으로 나타난다. 맑스는 화폐자본과 상품자본의 순환에 대해서 2권 1절에서 먼저 다루었다. 노동력은 이 과정에서 상품자본(LP)로 나타난다. 생산과정에서 움직이는 자본은 생산자본이다. 생산자본은 가치생산과 가치증식의 관점에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으로 나누어진다. 노동력은 여기서 가변자본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생산요소들의 가치를 생산물에 이전시키고 자신의 가치를 생산하는 것 외에 추가적인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치이동[유동]의 관점에서 생산자본은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으로 나누어진다. 1회의 순환에 유동자본은 자신의 가치 모두를 생산물로 이전시키지만 고정자본은 자신의 가치를 차례로 분할하여 생산물로 이전하고 이전되지 않고 남은 가치는 생산자본으로 고정되어 있다. 이 구분에서 노동력과 원료는 유동자본으로 나타나지만 기계류는 고정자본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유동과 고정을 가르는 근거는 그 자본의 가치이지 해당 생산요소의 물적=소재적 특징이 아님이 명심되어야 한다. 맑스는 케네, 아담스미스, 리카도 등의 고전경제학이 유통자본과 유동자본을 혼동하고 나아가 가변자본/불변자본의 구별을 유동자본과 고정자본의 구별로 환원한 점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가변/불변의 구별을 도입하지 않고서 잉여가치의 원천에 대한 분석은 불가능하며 이것은 노동력 상품의 노동시간이 가치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덮은 물신주의 관점을 완성한다.



    2010/07/07 14:31 2010/07/07 14:31

    다중지성 연구정원(waam.net) 불어세미나에서 함께 읽은 네그리의 최근글 「인간의 공통된 것을 발명하기」(Inventer le commun des hommes, pp.294-5) 핵심 부분의 초역이다.-아멜라노


    우리는 거의 3세기 동안 민주주의를 공적인 것의 관리로, 다시 말해 공통적인 것의 국가적 전유의 제도화로 생각해왔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이제 급진적인 그리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술어 속에서만 사유될 수 있다. 공통적인 것의 공통적 관리로서 말이다. 공통적인 것의 공통적 관리는 이제 공간을 코스모폴리티크하게 재정의하는 것을 함축하며, 시간을 구성적인(제헌적인) 것으로 재정의하는 것을 함축한다. 모두에게 (속해) 있으면서, 모든 것이 개인에게는 속하지 않는 것을 포착하는 계약의 형태를 정의하는 것이 더이상 문제가 아니다. 아니, 모두에 의해 생산되어지면서, 그 모든 것이 모두에게 속하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들 중 몇 사람이 <대주제>에서 (그들이 몇년 전부터 선도했던 경험에 의해서, 또, 예전에는 "틈새적"이었던 이 경험이 일반화되는 것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제기했던 자료들 속에서 우리는 이 공통적인 것을 가시화시키려고, 공통적인 것의 재전유 전략에 대해 말하려고 노력한다.
    오늘날 메트로폴리스는, 일반화된 생산조직이 되었다. 공통적 생산이 주어지고 조직되는 곳이 이곳이며, 공통적인 것의 축적이 실현되는 곳도 이곳이다. 이 축적의 폭력적인 전유는 사적인 것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거나, 혹은 공적인 것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메트로 폴리스 공간의 "지대(la rente)" 라고 부르는 것이 이제는 주요한 경제적 내기로 걸려있다. 그리고 통제의 전략들이 구체화되는 것은 이 지점에서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지대"의 이윤에 대한 관계에 대한 분석으로, 혹은 "생산적 외부성" 에 대한 분석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당장은 사적 전유가 아주 종종 공적 전유에 의해 보장되고 합법화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공통적인 것을 되찾기, 사물이 아니라 제헌적 과정을 재정복하기. 다시 말해 제헌적 과정이 펼쳐지는 공간을 재정복하기 - 요컨대 메트로폴리스의 공간을 재정복하기. 통제의 직선적 공간 속에 사선을 긋기. 디아그램diagramme에 사선diagonales을 대립시키기, 바둑판형에 간극을 대립시키기, 위치에 운동을 대립시키기, 정체성에 생성을 대립시키기, 단순한 자연에 무한한 문화적 다양성을 대립시키기, 기원의 참칭에 인공물을 대립시키기. 몇 년 전, 아주 멋진 책에서 장 스타로빈스키는 계몽의 세기는 자유의 발명을 목격하였던 시대라고 말했다. 근대 민주주의가 자유의 발명이었다면, 오늘날 급진 민주주의는 공통적인 것의 발명이고자 한다. 






    2010/07/01 00:35 2010/07/01 0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