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문》과 클론의 탈주

Posted at 2010/02/25 09:13// Posted in 쓰기(skribi)/시학_P
영화 《더 문》(감독: 던칸 존스)에 대해 어떤 블로거는 다음과 같은 소감을 쓰고 있다.

결국 영화들 속의 클론들처럼 우리들도 이 사회의 소모품으로 쓰여져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는 더욱 비싼 소모품이 되기 위해서 경쟁하고 스펙을 쌓으면 쌓을수록 혼자가 되고 고독해진다.1
영화  속 클론들과 현실의 개인들을 유비하고 있는 것이다. 스펙을 쌓기 위한 경쟁, 더 비싼  가격에 자신을 팔수록  쌓이는 고독. 이 유비를 밀고 나간다면 저 고독하고 삭막한 회색의 달은 자본에게 착취당해 황폐해지고 있는 지구와 유비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동일한 기억을 가진 샘들이 살아간다. 클론의 기억은 생물학-전자적으로 주입된 기억일 것이다. 텔레비전, 비디오, 신문, 인터넷을 서핑하며 점점 더 많이 동일하게 프로그램된 정보들을 주입하고 있는 현실의 개인들의 기억이 클론 샘의 기억과 얼마나 다를까? 프로그래밍의 집중과 집적 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현실의 개인들은 더욱더 클론화될 것이다.

작은 정보들은 그저 정보일 뿐이지만 정보들이 집적되고 집중되면 그것은 삶을 조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것을 조직하여 사람들에게 삶의 방향과 형태와 원리를 부과할 수 있다. 사람들을 전쟁에 나서게 할 수 있고, 부를 유일최고 가치로 추구하도록 만들 수도 있고, 자연에 복종하면서 '순리'의 삶을 살도록 만들 수도 있다. 이럴 때 정보는 상부구조라기보다 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토대일 것이다. 샘의 삶은 프로그램되어 있다. 3년간 청정 에너지를 지구로 보내는 노동자로 일하다가 지구로,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그가 돌아가는 가족들의 품과 지구는 차디찬 기계관이다.

그런데 클론이 이 프로그래밍된 세계의 외부를 지각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자신의 삶이 조작되어 있다고 느꼈을 때는 어떻게 되는가? 프로그램에 구멍이 나고, 예외가 발생하며, 자신의 삶-프로그램을 대상화하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그 프로그램에 주인이 있고 자신은 그가 부리는 자동인형에, 그가 사용하는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더 문》의 샘은 'SARANG-사랑'호를 탈출하여 지구로 돌아가 루나코퍼레이션의 비리를 폭로하여 주가를 32% 떨어뜨린다. 더 나은 대학, 더 나은 일자리, 더 높은 연봉, 더 많은 여가, 더 넓은 아파트, 더 먼 곳으로의 여행체험을 갖기 위해 매일매일을 더 강도높게, 더 오래, 더 열심히, 더 충성스럽게, 더 바쁘게, 더 비참하게, 더 우울하게, 더 허무하게, 더 아프게, 더 죽고 싶게 일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현실의 우리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혹은 그렇게 일하고 싶어도 주어지지 않는 일자리를 찾아 깨어있을 때는 물론이고 꿈 속에서조차 희비가 교차하는 중단없는 구직노동을 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1. http://strephonwook.tistory.com/368 [Back]
2010/02/25 09:13 2010/02/25 09:13
예술은 비물질노동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예술작품 중에서도 조형예술은 물질적 결과를 낳으며 음을 사용하는 음악, 몸을 사용하는 춤, 행위를 사용하는 퍼포먼스는 물질적 결과를 낳지 않는다. 언어예술의 경우에도 구전예술은 물질적 결과를 낳지 않고 문자예술은 그것을 낳는다. 들뢰즈가 예술작품을 감각의 기념비로 파악할 때, 그리고 루카치가 객관세계로부터 예술[미적 반영]의 거리두기와 독자적 세계로서의 자립화를 이야기할 때, 물질적 결과를 낳는 예술과 그렇지 않은 예술 사이의 구별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일까? 가령 자립적것은 물질적인 결과를 낳는 예술이고 과정 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자립화되지 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일까?

논리적으로는 루카치의 논의나 들뢰즈의 논의 모두 물질적 결과 여부를 기념비화나 자립세계화의 지표로 삼고 있지 않다. 물질적 결과를 낳지 않는 예술활동들의 경우도 감각의 기념비화나 일상세계로부터 거리를 두는 자립세계화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험적으로는 반드시 그런 것 같지 않다. 루카치가 조형예술과 춤 사이에 일정한 차이를 설정할 때, 즉 춤이 내면적 활홍경에의 함몰되어 있어 세계로부터의 거리두기에 성공하기 어렵다고 할 때 물질적 결과가 없는 예술에 대한 부정적 평가로 기우는 것 같다. 직업적 예술가 집단의 탄생과 그러한 노동분화의 긍정적 의미를 강조할 때도 그러하다. 들뢰즈의 경우도 문자예술과 회화, 그리고 영화를 주된 분석 대상으로 삼았음을 주목할 수 있다. 물질적 결과를 갖지 않는 예술형태에 대한 분석은 드물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물질적 결과를 낳지 않는 예술활동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일상적 삶이 예술적 차원을 갖게 되면서 일상생활 그 자체에서 실현되는 예술행위들을 식별하는 것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술의 독자성을 무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예술화라는 역사적 경향을 식별하기 위한 것이다. 일상예술은 인간이 일상적 삶에 함몰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살아나갈 초월론적 능력을 제공하는데, 여기에서 물질적 결과를 낳는가 아닌가는 유의미한 기준일 수 없다. 일상으로부터 분리된 공간에서, 일상시민으로부터 분리된 전문 예술가 집단이, 독자적 예술공간을 형성하는 것이 '거리두기-외화-자기귀환'을 거치는 예술활동의 목적으로 되었던 시대는 끝났다. 그것은 지금 예술을 수단으로 하는 이윤축적이라는 목적 하에서만 인위적으로 가동되고 있다. 삶예술은 그러한 메커니즘에 대항하면서 예술의 삶으로부터이 분리가 아니라 삶 자체를 어떻게 예술화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식 하에서 성장해 나오고 있는 운동이다.


2010/02/20 14:06 2010/02/20 14:06
루카치는 예술이 외부세계를 전유하는 활동이라고 파악한다. 주관적 요소 이전에 객관적으로 외부세계가 실재한다. 미적 주체성은 노동을 통해 형성되는 객관적 외부세계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전되어 나오는 반영형식이다. 미적 반영은 대상세계로부터의 일정한 거리두기를 포함하며 그 거리두기를 통해 예술작품은 독자적 세계, 자율적 현실로서 자신을 정립한다. 즉 "미적 형상을 통해 하나의 독자적 세계가 창조된다".(미학, 2권, 14쪽) 이것은 미적 내용이 심오한 형식으로 완성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미적 반영은 직접적으로 주어진 인간으로부터 분리되는 반영 속에서 자기객관화를 달성한다.

미적 반영은 주술로부터 독자화되어 나왔다. 이것은 열광적 황홀의 효과에 의지하는 춤보다 조형예술(그리고 언어예술)에서 더 두드러진다. 조형예술이야말로 확고한 외부세계의 재현이기 때문이다. 열광적인 황홀경은 점점 사라지는 데 이것은 거리취하기의 강도가 더 높아졌다는 의미이다(22). 거리두기가 강해지면 주술적 효용보다 모방적 요소가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것이 이집트 예술이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와 갖는 차이이다.

이 과정은 직업적 예술가 집단의 형성과 궤를 같이 한다. 이때부터 장식예술의 무세계성(Weltlosigkeit)은 약화되고 리얼리즘적 세계성이 공고해진다. 다른 한편 물질문화가 낮을수록 개별 사물들을 감각적으로 관찰하고 고정하는 재능이 뛰어나다. 이런 의미에서 동굴벽화의 자연충실성은 열정적인 리얼리즘 예술질서의 한 부분을 이룬다. 장식예술의 무세계성(장식경향)과 개별화된 대상 모사(모사경향)라는 두 가지의 원시성을 통합하면서 직업적 예술가 집단이 탄생하면 현실을 시각적 감각적으로 수용하는 고도의 집중성이 출현하여 비상한 수준의 작품을 낳게 된다.

루카치는 인간이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입장에 서 있다. 일상생활에서 노동을 통해 인간이 달성하는 사회는 비자연이 아니라 제2의 자연이다(42). 같은 논리에서, 예술세계는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독립되어나오는 제3의 자연일 것이다. 자신들의 환경을 지배하는 주인이 되었다는 체험은, 정상적인 인간적 삶이 확보되어 있다는 느낌은 역사적인 것이며 그것은 인간의 지각방식에 일대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직접성으로부터 거리를 취하는 예술행위는 노동을 통해 진정한 주체성이 확립된 것의 성과이다. 헤겔은 "도구를 통해 주체는 자아와 객체 사이에 일종의 표현매체를 만드는 셈이며 이 표현매체야말로 노동의 진정한 합리성이다."(48 재인용)라는 말로 이러한 인식을 표현했다. 루카치는 이것을 "작품 속에 삶의 새로운 성취들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직접성을 창출해 낸다"(51)고 달리 표현한다. 언어예술의 경우에도 진정한 시적 언어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자연반영적 언어의 단계를 거쳤다('검다' 이전에 '까마귀 같다').

질서의 원리는 세계지배의 산물이다. 원시농경 및 사육의 단계를 넘어서면서 예술은 추상적 질서로부터 구체적 질서로 원리의 이행을 겪는다. 무세계적 모사, 무세계적 장식, 그리고 세계창조적 예술로의 이행은 사회적 노동의 보편성을 통해 달성된다. 예컨대 리듬(대칭, 비례) 같은 것이 삶의 모든 산물들을 관류하는 힘을 얻게 되는 것도 이 과정에서다.

희곡, 회화 등 세계창조적 예술장르의 등장을 규명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이것은인간이 대상적 공간을 안정적 공간으로 체험하기 시작한 것의 산물이다. 이 장르들은 복합한 역사발전의 미적 반영이자 표현형식이다. 루카치는 "우리가 입증하고자 하는 어떤 변화도 기본적인 경제적 변화의 결과로 야기되는 상부구조 안에서의 운동들"(70)이라고 단언함으로써 이러한 발전을 경제적 발전의 효과로 돌려버린다. 실제로 루카치가 이야기해 온 것들은 인간이라는 대상적 존재와 대상 세계와의 부단한 섭동의 과정이었지 경제적 변화라는 통상적 술어로 축약할 수 있는 과정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주술에서 예술로의 이행은 미적 주체성이 경제적 주체성의 사후적 효과라기보다 노동 주체성(삶 주체성)의 두 측면이자 공정이었다고 해도 좋을 어떤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루카치의 미학사 서술은 그가 속해 있었던 맑스레닌주의적 교의로 계속 환원되곤 하지만 총체적으로는 그것을 넘어서는 요소를 갖는다. 미적 주체성이 자연적 사회적 제약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강조함과 더불어, 그것이 그 제약을 넘어서는 힘을 갖는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가 더불어 필요하다. 루카치는 후자를 전자만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기계적 유물론의 경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사회적 요구는 예술의 활동공간이다(77)라는 명제로 표현된다. 예술이 사회적 요구의 활동공간일 수 있는 가능성은 배제된다. 후기자본주의 예술관을 관념론적 조류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그의 미학관(75)도 이 역진을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루카치는 노동 분화에 대한 낭만적 반자본주의적 성향의 비판에 대해 엄격하게 거리를 둔다. 이는 노동 분화가 인간에 내재하는 능력과 자질을 일깨워서 인간의 전체성 개념을 확장하고 풍부하게 해주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간다(86)는 믿음에 기초한 것이다. 노동분화가 어떤 문제를 현실적으로 가져오고 있다 하더라도 노동을 예술과 분리불가능한 인간발생 활동으로 보고 있는 점은 현대 예술의 자의적 경향에 대한 중요한 비판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아니 우리는 지금 예술과 노동의 중첩이라는 탈근대적 사태에 직면해 있다. 예술을 기술적인 것만 연결지으려는 태도는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을 생산적인 것으로부터 분리시켜 오직 정치적인 것과만 연결지으려는 널리 유행하고 있는 태도도 문제적이다.

루카치가 파악하는 미적 주체성은 객관성 안에서 가치지향적이고 가치창조적인 불가결의 역할을 하는 계기이다.(99) 이를 위해서는 자연발생적인 추상성을 의식적인 추상성으로 변형해야 하고 다시 추상성을 지양하여 구체성으로 전화해야 한다. 루카치는 맑스를 따라, 인간은 자연력과 생명력을 갖춘 활동하는 자연존재라고 본다. 그리고 노동은  대상성의 형식들을 그 형식에 내재하는 법칙의 적용과 목적의식적 인식을 통해 인간의 목적에 부합하게 변형하는 행위이다.(103) 인간은 이 대상적 세계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면서 능동적으로 작용한다. 인간은 현실에 몰입하면서 그것을 극복한다. 이상과 달리 욕구는 인간에게 합당한 객관성을 추구한다.(106) 이것이 노동을 통한 인간의 자기창조의 과정이다. "인간은 대상적 세계를 가공하는 가운데 비로소 진정으로 자신을 윶거 존재로 보존하게 된다"(맑스. 104 재인용).

유물론적 인식론에서는 객관 없는 주관 없다. 하지만 루카치는 미적 형상의 영역에서는 이것이 역전되어 주관 없는 객관 없다는 명제가 성립된다고 본다.(109) 이리하여 미학에서 주관성과 객관성은 분리불가능한 것으로 결합된다. 이것을 루카치는 외화와 자기회귀의 운동으로 설명한다. 여기로부터 두 가지 미학적 명제가 나온다. 첫째 모든 예술의 본성은 리얼리즘적이다. 둘째 모든 미적 대상성은 옹호 아니면 거부의 당파적 입장을 내포한다.(111-2)

루카치에게서 미적 주체성은 앞서 말한 노동에 근거하여 개별적 개체에서 유적 인가의 자기의식으로 성장한다. 이 생각은 "산업의 역사, 그리고 산업의 대상적 존재야말로 인간의 본질적인 힘을 펼쳐 놓은 책이요 감각적으로 생생하게 주어진 인간의 심리학이다"라는 맑스의 명제에 근거한다. 인류학자나 고고학자가 도구와 노동생산물을 가지고서 인류의 발전사를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맑스는 교환을 동물과는 다른 인간적 능력으로 파악하고 있음에 주목하자.(121) 동물에게는 교환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동물종의 상이한 특성은 동물에게 무의미하게 된다. 보편적 인간성 관념은 비역사적이고 관념적인 것이다. 이와 달리 맑스의 유는 사회역사적 변화의 생성물이다. 그에게서 개체적 삶과 유적 삶은 통일된다.

루카치는 예술작품 자체야 말로 온전하고 진정한 미적 주관성의 실현물, 주관성과 객관성의 통일체라고 말한다.(128) 그리고 미적 주체성의 형성과정은 인간의 유적 자기의식의 형성과정이다.(미완)

2010/02/19 10:54 2010/02/19 10:54

삶정치의 양식으로서의 예술

Posted at 2010/02/07 12:23// Posted in 쓰기(skribi)/시학_P
바디우는 예술을 철학과의 관계 속에서 사유하면서 철학과 예술이 맺는 관계를 비미학(inesthétique)이라고 부른다. 비미학에서 예술은 스스로 진리를 생산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철학을 위한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몇 가지 예술작품들의 독립적 실존이 만들어내는 순전히 철학 내적인 효과를 기술한다".1

비미학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철학과 예술이 맺은 역사적 관계양식들에 대한 그 나름의 정리에 기초한다. 20세기에 철학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세 가지 도식에 따라 예술과 관계를 맺는다. 즉 철학은 예술에 대해 지도적이었거나(맑스주의) 낭만적이었거나(해석학) 고전적이었다(정신분석). 이것은 진리와의 관계에서 정의된다. 지도적 도식은는 예술은 (철학이 담지하는 바의) 자신 외부에 있는 진리를 모조한 가짜진리를 직접적으로 현시한다고 보았다(플라톤에서 브레히트로 이어지는 흐름). 낭만적 도식은 예술만이 진리를 육화할 수 있고 철학은 그것을 해석한다고 본다(니체, 하이데거, 들뢰즈). 고전적 도식은 예술이 진리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미메시스(사이비질서)를 수행하는데 그것은 예술의 목적이 인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치유(카타르시스)에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아리스토텔레스에서 프로이트, 라깡으로의 흐름).

바디우는 이 세 가지 도식이 포화상태에 도달한 상태에서 20 세기에 새로운 종합도식이 시도되었고 그것이 아방가르드(브르통과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상황주의)라고 말한다. 그것은 고전적 도식에 대항하여 지도적 도식과 낭만적 도식을 중재하고 불안정하게 그것을 추구한다. 그의 글을 읽어보자.

예술에 종말을 고하려는 욕망에서, 소외되어 있으며 진짜가 아니라는 예술의 성격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는 지도적이다. 또한 예술이 절대성으로서, 그 고유의 작용들에 대한 온전한 의식으로서 즉시 읽어낼 수 있는 그 자신의 진리로서 조만간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는 낭만적이다.(21쪽)

말하자면 아방가르드는 "창조적 파괴"의 절대성으로서 바디우에 따르면 그것은 지도적 낭만주의 도식이다.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세 가지 도식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면 이 새로운 종합도식은 완전히 막을 내리고 사라졌다. 그래서 바디우는 새로운 철학과 예술을 맺는 네 번째의 도식을 제안한다. 그것은 내재성과 독특함의 동시성을 긍정하는 도식이다. 예술은 그 자체가 하나의 진리의 절차이며(내재성), 그것은 다른 진리들(과학의 진리, 사랑의 진리, 정치의 진리 등)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철학은 다른 진리의 절차들과의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술과의 관계에서 예술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24). 어떤 실제적인 진리도 생산하지 못하고 오직 진리들을 파악하거나 보여줄 뿐인 철학이 그것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술적 짜임configuration artistique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술적 짜임은 "규정가능한 어떤 기간으로 사건을 통해 시작되고 이론상 무한한 작품들의 복합체로 구성되며 전적으로 해당 예술 내부에서 그 기간이 그 예술의 하나의 진리, 하나의 진리예술vérité-art2를 만들어 낸다고 할 수 있는 단위"(30)이다. 철학은 사유하는 주체인 작품들로부터 예술적 짜임을 드러냄으로써 그것을 의견들로부터 분리시키고 이렇게 함으로써 시간을 영원(유적 무한으로서의 진리)을 향해 돌려놓는 일을  수행한다(33).

이러한 비미학은 예술을 과학이나 사랑이나 정치로부터 독립시키는 훌륭한 방법이긴하다. 하지만 그것은 예술을 (물론 과학이나 정치나 사랑도) 철학의 품안에 품거나 혹은 그것의 아래에 거느리는 방법이다. 마치 나이든 사람들이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의 생식성에 기대면서 그들을 자신의 품에 거느리려 하듯이. 다른 길이 필요하다. 그것은 예술을 과학이나 정치나 사랑과 함께, 아니 철학까지도, (진리의 평면이 아니라) 삶의 평면에서 살도록 하는 것이다. 이럴 때 예술은 삶의 잠재력의 현전일 것이며(낭만적), 그 현전양식들과는 다른 독특한 현전(광의의 미메시스)일 것이고(지도적), 그 현전은 삶을 전체적으로 새롭게 여는 정화, 치유, 혁신의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고전적). 아방가르드가 예술의 종말을 갈구한 것은 지금까지의 예술이 삶의 평면에서 움직이기보다 삶을 오히려 예술 속에 봉쇄하는 전도된 위치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현실을 고발한 것이다. 우리는 그 문제의식을 안고 가야 한다. 아방가르드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그것을 더 철저하게 다중의 자기예술, 삶예술의 수준으로까지 철저화하는 것이다.   
  1. 알랭 바디우, 비미학, 이학사, 2010, 5쪽. [Back]
  2. 역서에는 예술진리로 번역되어 있지만 필요상 말을 바꾼다. [Back]
2010/02/07 12:23 2010/02/07 12:23
루카치 미학에 대한 잠정적 생각

루카치는 근대예술과 근대과학의 충실한 설명자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특히 부르주아 혁명기에 탄생한 근대예술의 원리들과 형식들을 이념화한다. 그런 한에서 루카치의 미학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특히 오늘날의 다중의 혁명의 예술적 이념으로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

『미학』 1권 1장과 2장에서 루카치는 일상생활에서의 반영과 과학에서의 반영을 식별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전자는 직접적이고 인간중심적인 반면, 후자는 매개적이고 탈인간중심적이라는 것이 주요한 주장이다.

반영개념은 오늘날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 합리적 핵심이 있다면 대상의 감각적 직접성을 넘어서는 보편적 특성을(예술적 반영의 경우는 대상의 특수성) 반영해야 한다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대상들 사이의 내적 관계와 대상과 인식주체 사이의 관계를 아우르는 다면적 관계들의 구축이라는 의미로 재개념화함으로써, 다시 말해 반영을 공통관념의 구축과 공통되기의 실천의 계기로 재정위함으로써 그 함의 중의 일부를 다시 사용할 수 있다.

루카치는 노동을 축으로 하는 일상생활에서부터 예술과 과학의 분화를 설명하려 한다. 이것은 예술과 과학의 노동으로의 재통합을 설명하려하는 네그리와는 상반되는 지적 노력이다. 그래서 루카치가 미학에서 맑스의 『그룬트리세』(의 고정자본에 관한 장)를 명백히 참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과학기술의 생산과정에의 적용에도 불구하고 남는 과학기술(그리고 예술)의 독자성을 설명하는 데 역점을 둔다. 우리는 이것이 과학자, 예술가 등의 분업적 특수성을 옹호하는 것으로 귀착되리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루카치는 노동으로부터 정치의 독자성을, 그리고 활동적 삶으로부터 관조적 삶의 독자성을 옹호하려 한 한나 아렌트와 기본 정신에서 일맥상통한다.)

루카치는 오늘날의 노동에서 이전의 노동과 비교하여 과학적 범주가 훨씬 더 큰 중요성을 지닌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이어 그는 "그렇다고 해서 일상적 사고의 기본적 특성이 폐기되는 것은 아니며 과학적 요소를 더 많이 받아들인다고 해서 일상적 사고가 과학적 태도로 변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급히 덧붙인다. 일상생활과 과학 사이의 엄연한 특성적 구분을 유지하는 것이다.

루카치는 예술과 과학의 독자성에 대한 주장이 예술을 위한 예술이나 과학을 위한 과학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위한 독자성임을 세심하게 덧붙인다는 점에서 일상생활 대 예술.과학을 경직되게 구분짓는 경향과는 선을 긋는다. 그에 따르면 과학적 방법이 일상생활의 직접적 요구로부터 (물론 상대적으로) 결별한 것은 일상생활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다. 예술과 일상생활의 차이도 그와 같은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루카치는 예술과 과학이 일상생활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이 점점 더 예술적 과학적 계기에 의해 크게 자극되고 있는 경향을 인지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예술과 과학이 차지하는 역할에 대한 인지는 예술.과학과 일상생활 사이의 엄격한 구분을 흐리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루카치는 노동하는 다중들이 스스로 예술과 과학의 수용자를 넘어 창조자로 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인정에 인색하며 그럼으로써 다중이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과 또 그렇게 되어야 할 필요성을 제시하는 데에는 무력하다.

그래서 그는 근대성의 이념에 누구보다도 충실한 미학자로 남아 있다. 이 입장은 그에게 플라톤주의적인 초월주의적 관념론의 전근대적 흐름을 올바르게 비판할 힘을 제공하지만  그로하여금 근대성의 경직된 분업을 넘어서려는  노력들 중의 의미 있는 부분까지도 근대에 대한 낭만주의적 비판이라는 이름 하에 기각하도록 만든다.

주목할 점은 그가 스피노자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의 인식의 진화론은 루카치에게서 일상적 반영으로부터 예술적 과학적 반영으로의 진화라는 형태로 재구성된다. 스피노자에게서 인식의 이러한 진화는 몸들의 진화, 몸들의 공통되기와 평행하는 것이며 그것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헤겔은 표상(종교)-직관(예술)-개념(철학)으로의 절대이성의 진화를 서술했지만 스피노자에게서 그것은 표상-이성-직관으로의 윤리적 진화로 나타났던 것이다.

루카치에게서 인식의 진화는 몸의 진화와 평행하기보다는 도구, 기술, 개념, 방법의 진화에 의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들이 변증법적 매개 개념에 의해 포괄되고 있는 바이다. 그리하여 매개 개념은 직접성에 대한 강력한 공격지대를 구축한다.

매개를 통한 직접성의 극복(루카치)과 공통되기를 통한 직접성의 재구성(네그리)가 대비될 수 있다. 두 사람은 대비되지만 한 가지 점에서 중요한 공통점을 갖는다. 그것은 노동과 그 진화에서 원리를 찾는 것이다. 루카치는 노동을 일상생활의 기본범주로 본다. 예술과 과학을 경유하여 혹은 그것들의 흡수를 통해 일상적 반영은 유적 자기의식에로 접근해 갈 수 있다고 그는 파악한다. 반면 네그리는 동일하게 노동에서 원리를 찾으면서도 노동의 비물질화, 지성화, 미학화와 과학화를 통해 노동의 담당층이 변화하며 이 과정에서 생성된 다중이 노동 주체이자 예술주체이고 과학주체로 되어가는 경향에 주목한다.

우리는 루카치에 맞서 직접성에서부터 공통성의 개념을 구출할 수 있다. 직접적으로 보이는 것들은 비매개적 방식으로 연결되는 다양체이자 공통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통체는 도구나 기술을 사용하지 않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도구나 기술조차도 실제로는 공통되기의 한 요소로 이해될 수 있다. 공통되기의 과정은 자연(환경)-기계-인간(생명)이 새로운 연관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기계는 매개하는 존재라기보다 그 자체가 공통되기의 창조과정의 참가자로 이해될 수 있다.
2010/01/23 00:56 2010/01/23 00:56
질문들
루카치는 과학은 이야기하는데 철학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철학도 과학적 반영의 일부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과학적 반영에서 주관적인 것의 배제나 괄호치기가 가능한가?
들뢰즈의 탈기관체화와 루카치의 객관화의 차이와 공통성은 무엇인가?

2010/01/22 20:32 2010/01/22 20:32

미학시학연구 링크

Posted at 2010/01/08 08:41// Posted in 쓰기(skribi)/시학_P
벤야민의 미학과 예술론
김영옥, 벤야민의 역사철학과 미학이론
http://blog.daum.net/gjsdljm1127/859

넬슨 굿맨의 예술이론
http://newroa.egloos.com/3351344

네그리의 미학
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Irreducible Innovation
http://www.electronicbookreview.com/thread/endconstruction/lateral


2010/01/08 08:41 2010/01/08 08:41
미학에 대한 제 각각 다른 규정은 삶에 대한 다른 시각과 태도에서 나온다. 공통되기의 존재론은 근대적 잉여가치화의 인식론 및 구조주의에 대한 비판 및 그것과의 투쟁을 함축한다.  이것은 공통되기를 통한 생명의 자기혁신과 자기창조(autopoiesis)가 잉여가치의 틀 속에 갇히는 것에 대한 거부의 운동을 함축한다. 공통되기의 존재론에서 볼 때 미적인 것은 시학적인 것이며 그것은 생산적이고 활동적인 것이다. 그 생산성과 활동성은 특이한 것들의 사회역사적 공통되기의 맥락에서 정의된다. 공통되기는 오늘날 삶정치적 생산에 기반을 둔다. 시학과 창조력은 가치론의 살이다. 그것들은 이질적인 것들의 협력과 공통되기를 통한 세계구성, 새로운 제헌의 과정이다.  특이화하는 공통되기 혹은 공통되는 특이화는 역사 그 자체이다. 그것은 정체화하고 잉여가치화하는 경향, 즉 죽음충동에 맞서는 삶충동의 역동이다. 미학은 죽음에 대한 관조를 함축하지만 시학은 오직 삶의 관점과 비전에서만 죽음에 관심을 갖는 활동이다.

시학이 '특이화하는 공통되기'의 활동과 그 이론으로 방향 잡을 때, 20세기 미학사는 어떻게 보이게 되는가? 루카치의 반영론과 리얼리즘론은 공통되기를 대상화하면서 관조한다. 하이데거는 미의 문제를 기원으로 가져감으로써 존재론화하지만 공통되기를 세계를 변혁하고 구성하는 실천적 활동으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 벤야민은 기술과 매체가 일상 속에서 어떻게 공통되기를 촉진하는 수련도구로 기능할 수 있는지를 규명한다. 그는 기술이 몰아적이고 집단적인 진정한 우주적 경험을 가능하게 하리라고 보았다. 마르쿠제는 공통되기를 현실원칙을 넘어서는 쾌락원칙의 구현으로, 요컨대 에로스의 해방으로 이해했다. 아도르노에게서 공통되기는 자본주의 문명을 재현하면서 비판하는 순수와 자유의 추구로 나타나지만 그것의 궁극적 지평은 자연으로 귀착된다. 야우스는 예술의 수용현상 속에서 공통되기의 수용적 측면을 강조하며 하버마스는 공통되기를 합리적 의사소통의 문제로 해석한다. 넬슨 굿맨은 예술언어의 (모방과는 다른) 지시적 측면을 탐구하면서 이미지를 복사가 아니라 관찰자가 독해하는 연관들의 고안으로 본다. 이로써 그는 재현과 리얼리즘의 틀 속에서 공통되기의 문제를 사고할 길을 연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공통되기를 숭고로 환원한다.  등등.
2010/01/08 08:04 2010/01/08 08:04

어메너티 amenity

Posted at 2009/12/29 20:29// Posted in 쓰기(skribi)/시학_P
작가 김종성이 보내온 소설집 마을(실천문학사, 2009)를 읽다보니 작가의 말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21세기의 가장 큰 화두로 등장한 환경문제라는 측면에서 볼 때 농촌은 어메너티amenity 상실이라는 커다란 문제에 봉착해 있다. 미야모도 겐이치는 『환경경제학』에서 "어메너티란 시장가격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을 포함한 생활환경으로 자연, 역사적인 문화재, 거리풍경, 지역문화, 공동체 연대, 인정, 지역적 공공서비스, 교통의 편리함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메너티 문제는 환경생태문학에서 중요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환경문제는 사회문제에서 나왔으며 환경위기의 원인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세계를 상품화하려는 시장 논리에서 기인한다는 데 초점을 맟추어 인간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서 찾는 머레이 북친의 이야기에 주목해 왔다.


이런 의미로 어메너티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신경제학이 '외부성'으로 파악한 것이며 자본이 무상으로 가져다 쓸 수 있는 부이다. 이것은 나의 그림에서 실제적 부(D)라고 불렀던 것의 경계지대에 있는 것들이다. 자본은 이것을 무상으로 가져다 쓰지만 반드시 가치화한다. 그것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가능하다. 우선은 부채다. 문화(재), 자연가꾸기, 공동체연대 등에는 어떤 형태로건 에너지가 필요하며 여기에는 활동이 든다. 그 활동에 드는 비용에 신용을 주고 그것을 지렛대로 이자 등을 수취한다. 둘째는 울타리치기다. 과거세대들의 성과물 혹은 자연이 생산하는 부에 울타리를 쳐서 입장료를 받는다거나 사용료를 받음으로써 자본은 수입을 올린다. 자본이 스스로 외부성의 창출에 투자를 하고 그것이 합체된 토지 등의 가격 인상을 통해 수입을 올리는 경우도 있다. 김종성이 "모든 생명세계를 상품화하려는 시장논리"는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위의 어메너티에는 비자본적 방식으로 창출된 것과 자본적 방식으로 창출된 것 모두가 포함되어 있다. 자본이 어메너티를 모두 파괴한다고 말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어메너티는 파괴되면서 또 생성된다. 문제는 잉여가치화적 어메너티가 아니라 공통되기적 어메너티의 창출이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어메너티를 공통되기의 운동 속에 배치하는 문제이다.

얼마전 북설악에 있는 어떤 황토집을 다녀온 적이 있다. 몇 가구 살지 않는 북설악 용대리에서 콜롬비아 대학을 졸업한 원어민 교사가 마을 학생들에게 '몰입'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작가 활동을 하는 젊은 재미교포 여성이었다. 황토마을의 머슴 노릇은 동남아 출신으로 보이는 이민자가 맡고 있었다. 황토마을의 중학생 땅은 인도에 있는 국제학교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고 했다. 김종성은 김종성이 "아파트단지의 파도는 농촌에 사교육 광풍과 영어몰입 열병으 함께 옮겨왔다."고 표현할 때 아마도 이러한 상황을 묘사하려 한 것 같다. 세계화는 대도시만이 아니라 깊은 산촌에까지 파고들었다. 여기에서 위계와 차별과 독점이라는 그리드(grid)를 걷어내면 지구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global pillage(전 지구적 약탈)가 global village로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어떻게?
2009/12/29 20:29 2009/12/29 20:29

선데이 서울

Posted at 2009/11/29 14:37// Posted in 쓰기(skribi)/시학_P
어쩌다가 텔레비전에서 보게 된 영화 [선데이 서울]. 도중에 끌까 말까 하다가 끝까지 보게 되었던 것은 뭔가 매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에서 동급생들로부터 매를 맞고 돈을 뜯기며 다시는 학생이 실제로는 사나운 늑대인간이었다는 것.(폭력배보다 더 우월한 인간)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남자들의 희롱거리가 되곤 하는 여성이 실제로는 무예고수였다는  것.(남자보다 더 우월한 인간)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파는 할머니가 실제로는 우주인이었다는 것.(미국보다 멀고 미국인보다 더 우월한 인간)

억눌린자들의 꿈으로서의 늑대인간, 무예고수, 그리고 우주인.

2009/11/29 14:37 2009/11/29 14:37

머시니스트 대 코뮤니스트

Posted at 2009/11/23 17:41// Posted in 쓰기(skribi)/시학_P

다음은 우연히 발견한 한 리뷰이다. 영화 머시니스트1를 다루고 있다.


"하나의 유령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노동자들이라는 유령이. 이미 현실사회의 세력으로서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어느 누구도 상대하려하지 않고 애써 무시하고자하는 퇴물로. 머시니스트는 유령과 같은 존재와 끊임없이 싸우고 있지만 결국 자기 자신으로 드러난다. 한편으로 유령이 현실 세계에 없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누구나 꺼리고 있다는 점에서 진실이다. 거울 속에 갇힌 채 오전 1시 30분이면 의식이 끊겨 새벽의 희망도 갖지 못한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건가? 선반기계에 잘려나간 손가락을 대신해서 엄지발가락을 붙여도 심지어 팔이 통째로 떨어져나가도 자기 분신과도 같은 동료를 원망한다. 1년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180센티미터에 55킬로그램의 산송장은 몸 파는 여인에게만 위로를 받는다. 음모야!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공모해서 날 내쫓으려고 해. 팔을 집어넣고 수리하던 기계가 갑자기 작동되고 냉장고엔 뜻 모를 메모가 남겨져있고 자신에게만 보이는 한 사람이 주위를 맴돌며 기분 나쁜 웃음을 짓는다. 지식인 노동자들의 운명이다.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거라 믿었지만 홀로 남았다.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내며 우리의 운명은 머시니스트고 질서에 순종해야 하고 혹 지독하게 운이 안 좋더라도 보상금으로 만족하면 된다고 한다. 유령보다 더 무서운 건 인간이고 노동자를 가장 냉대하는 건 바로 노동자 자신이다. 자본가는 유령처럼 사라졌고 감독자가 대신하고 있지만 노동자이면서도 아닌 척 하며 가장한다. 노동자들은 유령이 되어 '있는 척' 도시 여기저기를 배회하지만 자기 목에 칼을 댄다. 자본가는 무대 위에서 이미 철저하게 지워졌지만 신의 반열에 올라 전능하다. 어린아이는 이들의 공모에 의해 길거리에서 살해됐다. 가상의 세계가 아닌 현실세계에서."2

머시니스트에서 코뮤니스트로의 이행의 순간은 언제인가? 그 순간이 올 것인가? 코뮤니스트가 천국직행열차라면 머시니스트는 지옥직행열차? 천국행 열차에 대한 조롱? 고도는 오지 않는다와 고도는 이미 여기에 있다 사이.

"내 우정을 돈으로 살 필요는 없어요. 그냥 영화나 가끔씩 보여줘요."


화폐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삶에 대한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가 이것을 체험하지 못할 때 항상 화폐를 불러 그 도움을 청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삶으로부터 소외되어 구천을 헤매게 된다. 자동기계체제는 유령처럼 인간의 의지 밖에서 산다. 손가락을 자르고, 팔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면서.....코뮤니즘도 인간의 의지 밖에서 사는 유령인가?  아니면 자본의 의지밖에서 사는 유령인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가? 머시니스트는 인간의 의지에서 독립적으로, 코뮤니스트는 자본의 의지에서 독립적으로!

  1. http://movie.gomtv.com/224/21534/021 [Back]
  2. 출처: http://www.cine21.com/Community/Netizen_Review/review_read.php?no=45762 [Back]
2009/11/23 17:41 2009/11/23 17:41

미학에서 시학으로

Posted at 2009/11/22 12:14// Posted in 쓰기(skribi)/시학_P
미학에서 시학으로 라는 기치는 능동과 생산에 강조점을 두는 방향으로의 관점 이동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 기치가 의미를 갖는 것은 poiesis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에서 그대로 가져온다)

Poiesis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Poïesis is etymologically derived from the ancient Greek term ποιέω, which means "to make". This word, the root of our modern "poetry", was first a verb, an action that transforms and continues the world. Neither technical production nor creation in the romantic sense, poïetic work reconciles thought with matter and time, and man with the world. It is often used as a suffix as in the biology terms hematopoiesis and erythropoiesis, the former being the general formation of blood cells and the latter being the formation of red blood cells specifically.

In the Symposium (a Socratic dialogue written by Plato), Diotima describes how mortals strive for immortality in relation to poieses. In all begetting and bringing forth upon the beautiful there is a kind of making/creating or poiesis. In this genesis there is a movement beyond the temporal cycle of birth and decay. "Such a movement can occur in three kinds of poiesis: (1) Natural poiesis through sexual procreation, (2) poiesis in the city through the attainment of heroic fame and finally, and (3) poiesis in the soul through the cultivation of virtue and knowledge."

Martin Heidegger refers to it as a 'bringing-forth', using this term in its widest sense. He explained poiesis as the blooming of the blossom, the coming-out of a butterfly from a cocoon, the plummeting of a waterfall when the snow begins to melt. The last two analogies underline Heidegger's example of a threshold occasion: a moment of ecstasis when something moves away from its standing as one thing to become another.1

 
  1. http://en.wikipedia.org/wiki/Poiesis [Back]
2009/11/22 12:14 2009/11/22 12:14

언노운 우먼의 세계

Posted at 2009/11/17 10:57// Posted in 쓰기(skribi)/시학_P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영화 [언노운 우먼]. 우크라아나 출신 이레나의 삶은 성(매춘), 폭력, 돈에 의해 지배된다. 국가, 법, 경찰 등의 근대적 장치가 등장하지만 이탈리아에서이지 우크라이나에서가 아니다. 오직 개인 대 개인이 부딪히는 우크라이나에서의 삶은 전근대적 삶의 양상이라기보다 초근대적인 삶의 양상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근대성의 위기와 파괴 속에서 나타나는 삶, 근대성의 보호장치가 없고 그것의 억압만이 시민사회 속에서 적나라하게 재생산되는 삶이기 때문이다.

이 삶의 부정성들에 대항하는 이레나의 선택은 무엇인가? 그것은 먼저 생물학적인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것이라고 추정한 아이에 대한 목숨을 던진 집념이 그것이다. 결국 자신의 아이가 아닌 것으로 판명나는 아이에 대한 집념이라면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습관? 이데올로기? 상처 입은 삶을 만회하려는 욕망? 그것의 정체가 무엇일까?

이 영화의 또 하나의 메시지는 "자신의 힘으로 홀로서기"이다.홀로설 수 없었던 자신을 만회하기 위해 이레나는 떼아에게 홀로서기를 가르친다. 홀로서기는 중요한 미덕이다. 하지만 이 초근대성의 세계에서 홀로서기는 철저히 개인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어떻게 서는 것이 진정으로 홀로서는 것인가? 개인들이 조직화된 폭력에 맞설 수 있는가? 홀로서기에 필수불가결한 구성부분인 "서로 돕기"가 간과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마지막 장면에서의 반전, 즉 서로 혈연관계가 아닌 이레나와 떼아가 새로운 차원에서 다시 사랑의 관계를 맺는 과정이 없었다면 이 영화의 아름다움은 크게 실추되었을 것이다. 감독은 이 마지막 한 장면을 위하여 앞에서 무수한 어둠의 덫들을 설치하고 장애물 경주를 하도록 했던 것일까?
2009/11/17 10:57 2009/11/17 10:57

문래동 신주쿠 전

Posted at 2009/11/09 21:26// Posted in 쓰기(skribi)/시학_P

문래동 노네임노샵 지하에 24명의 사진작가들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문래동 신주쿠 전이다. 공간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어두운 지하에 옛 문틀을 의자에 받쳐놓은 전시대들. 그 위에 백열등이 전시된 포토폴리오들을 가리키고 있다. 전시품들의 경향들을 생각해 본다.

 

  1. 신동필은 사회적 투쟁들을 직사 방식으로 찍었다. 1991년 투쟁 연작들이 눈에 띤다. 박지원은 [난중일기]에서 촛불시위의 여러 모습들을 이미지화했고 라틴아메리카, 우루과이, 인도차이나, 베트남 등의 서민적 삶, 소외된 삶 속에서 움직이는 생명과 활력을 주제적 방식으로 이미지화했다. 작품 목욕은 죽어가는 생명이라기보다 스러져가는 생명을 보여준다. 주변의 자연물들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지는 한 노인, 그는 작가의 친모이다. 철의 실크로드로 시베리아 횡단과정의 이미지들을 모은 작품들도 인상적이다.
  2. 레이저 기술로 핏줄 등 "도관성"의 단면들을 그린 일본작가의 작품은 인상적이다. 테크놀로지가 육안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독특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작가들의 작품에는 연출성이 강하다. 자연이나 사회 속에서 채취한 것들보다 특정한 주제를 설정하고 피사대상들을 연출해서 만든 작품들이 많다. 사막을 가서 이러저러한 유형의 발자국을 내고 그것을 찍는 것 등도 여기에 속한다.
  3. 전통을 찾는 작품과 탈근대성을 보여주는 작품군도 대비된다. 옛 시골길들의 흔적을 찾아가며 찍은 사진들과 독특한 성형, 문신, 장신구 등을 찍은 사진이 이 관점에서 대비될 수 있다.
  4. 전체적으로 대부분의 사진들이 존재의 숨은 단면들을 보여줌으로써 자본에 의해 조직되는 우리 삶 자체를 대상화하면서 성찰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2009/11/09 21:26 2009/11/09 21:26

관계미학(relational aesthetics)

Posted at 2009/11/09 15:37// Posted in 쓰기(skribi)/시학_P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준비하고 있는 The NJP Reader #1에서 준 서면 인터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백남준과 관계미학'의 문제에 직면한다. 세 가지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Artistic anthropology intends to produce novel models of relationality and connectivity. Could – Nam June Paik's legacy as a form of – artistic anthropology contribute to an artistic discourse going beyond the framework of relational aesthetics? Who are the artists in our day developing relevant examples of rethinking and recontextualizing an artistic anthropology?
 
2. What could artistic anthropology mean for a current artistic practice? How could it relate to medium-specific qualities? Is it a form of artistic communication defined by a post-medium condition? Or is it a practice that demands the concept of medium-specificity to change?
 
3. What could artistic anthropology - as a form of knowledge production - mean for the current classification system? Will it challenge the dominant paradigms of the established humanities and sciences? What type of new models might this trigger? How can artistic anthropology contribute to a better and more political understanding of the human condition? And what could artistic anthropology mean for the concept of art in general?

관계미학에 관해 참조할 만한 중요한 문서


2009/11/09 15:37 2009/11/09 15:37

백남준과 영원성의 문제

Posted at 2009/10/21 02:02// Posted in 쓰기(skribi)/시학_P

백남준은 영원성에 대한 추구를 인류의 질병이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백남준의 예술실천이 직면한 한계을 표명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기존의 선형적 무한성에 대한 추구를 비판했고 기존의 협화음, 고정관념, 기성질서 등을 파괴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것을 통해 그는 새로운 음의 세계를 드러내고 기존 질서가 밀어낸 것으로 한 걸음 나아가도록 자극했다. 이것은 분명 반란이다. 우리는 이 반란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고 그것의 현재적 의의를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그가 도달한 것은 어디였을까? 그는 음악을 공간화하려 했고 잠재력의 세계를 부인했다. 그는 비인과적 결합의 원리로서의 동시화를 추구함으로써 우연적 결합, 새로운 배치를 중시했다. 이것이 그의 관계론적 미학이다. 하지만 무엇들의 관계일까? 무엇들의 새로운 배치일까? 배제된 것들, 추방된 것들. 하지만 그는 배제된 것들과 추방된 것들의 적극적 함의를 드러내는 데 성공했는가? 그에게서 배제되고 추방된 것은 실재하는 구성력을 분명히 지시하지 못한다.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주체성에 대한 사유를 전진시키지 않음으로써 배제된 것은 사소한 것의 범주에 머무른다. 그래서 혁명적 동력, 다중적 추진력은 좀체 그의 작품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관계론적 사유는 활력을 경시하며 비판적 파괴적 미학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게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활력의 경시는 영원성의 부정의 효과가 아닐까? 그는 무한성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영원성까지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는가? 그래서 시간을 크로노스의 틀 속에서만 이해하고 시간의 진정한 실체인 활력과 영원성을 놓치지 않았는가? 그래서 시간화라는 문제가 그에게서는 공간의 한계 내에서 사유되어오지 않았는가? 공간화된 음악을 시간화하는 것이 필요한 때에 다른 공간화를 추구하는 데 머문 것이 아닌가? 선형적 공간에서 펼쳐진 공간으로! 그래서 시간, 활력, 영원성과 대면하는 문제는 다시 우리에게 넘어온다.

그래서 예술적 생성의 문제가 다중의 천재성이 아니라 예술가 백남준 개인의 천재성에서 찾아진 것이 아닐까? 상상력은 길을 찾지만 다중의 예술적 활력을 에두르고 피하면서 나아갔던 것이지 않을까? 그것이 노년 백남준을 다중보다는 자본에게 포섭되도록 만든 예술실천적 조건이었던 것이지 않을까?

2009/10/21 02:02 2009/10/21 02:02

백남준 강의 메모

Posted at 2009/10/20 20:40// Posted in 쓰기(skribi)/시학_P

백남준은 맑스주의에 심취했던 동경유학시절 잡지 카마라드에 드뷔시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다.

캘커타와 카이로를 방문.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와 공동 전시를 하다. 벽암록에서 아이디어를 빌어오다. 록펠러 재단의 기금을 이용하다. 스톡 하우젠의 수학적 음악(전자적 번역)은 별로 좋아하지 않다. 헤겔을 좋아하다.

 

Expel. Exposition of music Electronic television. 성인들을 위한 유치원. '아이디어'의 물신주의. 공명의 오브제. 선수행의 도구들. 미국식 피아노 서곡. 너 스스로 하라. 18세기로부터 떼어낸 것. 내용없는 시간은 가능한가?  70%만족하는 법, 20세기의 기억. 공명실. 준비된 화장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루돌프 아우그스쉬타인에 바친다. 비인과적 결합 원리로서의 동시화. 독일백치론 연구 등의 16테마.

음악을 공간화(미술화)하는 것이 백남준의 기획이었다. 에고가 없이 관계론적 인식 하에서 예술행위를 하다.

바르톡은 국민음악가. 한스 제들마이어, 루돌프 아우그쉬타인. 소머리와 전염병, 그리고 검역관. 비디오아트는 이상한 유형의 종합이다.

전자음악에 샤머니즘을 가미하다. 소머리는 고사형식이다. 돼지머리 대신 소머리(모나-지배자)를 사용하는 것은 특별한 유형의 고사. 예컨대 범굿의 경우. 호랑이만이 소머리를 먹는다.

호랑이는 살아있다. 네번째 위성아트. 백남준의 토템은 호랑이였는가?

 

핼 포스터의 해석: 상징을 재현한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아방가르드의 파산에서 백남준의 예술은 시작한다.

질문에는 질문으로 대답한다

소머리를 자르는 것은 아나키즘이다. 소머리를 통과한 후 관객은 기어들어간다 Creep into the virgin of female whale. 다음은 피아노를 밟고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계약내용으로서의 예술공간.

 

다른 세계의 가능성. 다른 소리의 가능성. 사물의 다른 잠재성을 이끌어 내기. . 네개의 피아노 협주. 철조망. 아이. 철조망 넘어, 폐허를 넘어, 자동차 모터와 더불어, 전구의 번쩍 거림과 더불어, 다른 소리가 난다. 첫번째 피아노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무음음악. 침묵. 제로사운드. 정상피아노. 비서구적 소리와 서구적 소리이 연결. 보이스가 피아노를 부순 것은 역사적 사건. 보이스는 백남준보다 11살 많은 사람이다.

몽골 샤머니즘의 잠재력.

들뢰즈 이전의 백남준.

419 516 이후 집안몰락, 증권투자.

영원성에 대한 숭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병이다.

본질에 대한 집착, 생성과 관계에서 보자. 선불교적. 달토끼 대 달팽이.

 

비인과적 결합 원리로서의 동시성

인연의 인과론

우연

동시=시간종합=크로노스의 종합

Unheimlische

영원성에 대한 부정, 힘에 대한 부정, 잠재성의 차원, 의미의 차원을 우연성에 맡긴다, 주체성을 부정하거나 망각한다, 재배치의 기술, 관계론과 구조주의의 연관성. 탈구조주의적 관계론.

섬뜩함=각성, 계몽

탈문법적 탈상식적

 

음악은 리니어하다?

음악의 시간성은 선형적인가?

음악이 깊은 차원에서 울림과 관계 맺는 것.

리또르넬르도?

 

유치원, 발, 자궁, 태양중심에서 달중심으로,

혀뿌리로 듣는 음악

감각의 전환

관세음

 

쿠바침공

히틀러(마네킹 자르기)

 

정치적 예술.

상업세계에서의 저항 방법은 무엇인가?

무한성에 대한 욕구와 영원성에 대한 욕구의 대립.

 

새로운 배치를 보여주지만 지성적 배치이고 실재적으로 탄생하는 재배치의 경향을 살려내지는 못한다.

 

이데아를 영원성 개념으로 파악.

64년 레비스트로스 슬픈열대

 

유라시아 웨이와 글로발

천재성은 개인의 것인가 다중의 것인가

다중의 천재성.

TV 조각.

청년 백남준과 노인 백남준은 연속적인가 단절적인가

2009/10/20 20:40 2009/10/20 20:40

(2009년 9월 29일 한겨레 그림판)

이른바 '진보 경제학'이 이명박 군주 앞에서 수치의 진땀을 흘리며 무릅을 꿇고 있다.
정운찬은 이미 누더기가 되었다.
그가 마음 속에 숨겨놓은 할 말이 있는 것일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서민 행복? 폐하 만세?
며칠 전 누군가는 이명박에 의한 정운찬의 총리후보자 지명이 야권의 차기 대권 후보로 떠오르고 있는 그를 무너뜨리기 위한 공작이라고 말했다.
너무 진한 음모론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 그림이 보여주는 것은 적어도 이명박이 정운찬의 기를 완전히 꺾은 상태에서 자기 입맛에 맞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명박의 '중도실용'은 이른바 '진보'의 껍질을 다 깎아낸 후에 '실용'한다는 의미인 듯하다.
부패한 자들의 노름판이 중도실용이다.
이 노름판에 판돈을 내는 사람들은 많다.
지독하게 가난한 사람들까지 은행에서 돈을 꾸어 판돈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과 부를 향한 대장정 대오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금의 군주들이 수치의 진땀을 흘리며 다중 앞에 무릅꿇는 날을 위한 계획은 누가 세울 것인가?
2009/09/30 06:12 2009/09/30 06:12

누구나 예술가인 시대

Posted at 2009/09/05 10:21// Posted in 쓰기(skribi)/시학_P
어제(9월 4일) 용인에서 열렸던 '백남준의 선물.2' 국제세미나에서 폭발적인 쟁점 중의 하나는 '누구나가 예술가인 시대'에 대한 태도를 둘러싼 것이었다. 나는 누구나가 예술가인 시대에 아방가르드적 혁명적 예술가의 역할은 자본에게 소유되어 있는 예술수단을 훔쳐 다중에게 돌려주는 스파이가 되는 것이라는 스파이론을 제시했다. 이 문제에 관해 말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생각들을 정리해 두자.

*                            *                            *

1. 누구나가 예술가인 시대라는 말은 잠재성의 수준에서 정의되는 것을 넘어선다. 다중은 잠재적으로 예술가이지만 단지 잠재적으로만 다중이 예술가인 것만은 아니다. 다중은 매일매일 예술가이기를 강요받고 있고 그것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예술가로 단련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과정의 미적 예술적 패러다임으로의 변화는 노동하는 사람들의 예술가화를 강제하고 재촉하고 촉진한다. 창조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임금도 없다는 것이 신경제의 논리이다. 포스트포드주의는 구상, 상상의 기능을 노동자에게 넘김으로써 노동하는 사람들은 실행하는 주체일뿐만 아니라 구상하는 주체, 상상하는 주체, 기획하는 주체, 창조하는 주체로 된다. 매순간 노동자가 예술적일 것을 요구받는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물론 누구나가 예술가라는 말을 사실주의적 재현의 술어로 이해해서도 안 될 것이다. 현실에서 누구나가 예술가이므로 예술가란 현실에서 우리가 흔히 발견하는 범상한 사람들 이상이 아니다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현실의 저변에서  보통사람들의 예술가다움을 자주 목격하고 그것에 놀라지만 그렇다고 이미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고 부른다면 강변을 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가 예술가인 시대는 잠재성과 현실성 사이, 그러니까 잠재성의 현실화를 향한 강력한 경향의 정의로서 사용되는 것이 가장 적실할 것이다.

2. 누구나가 예술가인 시대의 이미지를 노동과정/노동시간에서만 표상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또 전형적이지 않다. 그렇게 된다면 예술이 자본에 포섭된 운명만을 부각시키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과정의 연속이면서 동시에 단절이기도 한 투쟁과정/투쟁시간 속에서 예술을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 촛불시위와 집회는 거대한 집체예술이었다. 구 사회주의국가들에서 전개되는/된 집체예술이 중앙에서 철저하게 계획되고 조직되고 통제되는 집체예술이었다면 촛불집체예술은 특이한 사람들의 자발적이고 또 자율적인('자율적'은 '자발적+의식적'이다) 참여에 의해 꾸며진 집체예술이었다. 촛불을 든 사람들의 역동적 숨결과 행동, 매순간 이루어진 어떤 폭발들, 기술들이 예술로 전화되었다. 와이브로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생중계방송, V for 벤뎃타, 민중가요들, 춤, 피켓, 포스트잇,  플랭카드, 사물놀이패, 함성, 컴퓨터, 인터넷, 양초, 전기초, .... 온갖 것들과 온갖 사람들이 집체예술의 획과 텃치로 짜여져 들어왔다. 그것은 시공간을 유동화시키는 강력한 힘이었다. 다크 매터(dark matter), 다크 에너지(dark energy)가 폭발하여 가시성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밤샘시위는 낮밤의 구별을 깨뜨렸고 도로는 행진로로 바뀌었다. 시공간의 역전은 백남준의 예술이상이지 않았던가? 서울 도심은 촛불빛이 쏘아져 만들어진 거대한 스크린이었다. 그것은 거대한 비디오아트였으며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와 연결된 디지털 컴퓨터네트워크 아트였다. 그것은 위성예술의 이념을 메트로폴리스에서 실현한 사건이었다. 이 예술적 대사건 속에서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기술과 능력을 자본으로부터 훔쳐내 다중의 투쟁 속으로 돌려준 스파이들로 기능했으며 사람들 누구나가 스스로 의식했건 아니건 상관 없이 하나하나 예술가였다.

3. 2009년 7, 8월 평택시 칠괴동 쌍용자동차공장을 생각해 보자. 7월 하순부터 공장위로 헬기가 난다. 치치치치하고 끊임없이 나는 헬리콥터 소리, 투항을 권유하는 사측의 선무방송, 사측이 틀어놓은 감상적 노래들, 지원온 사람들의 웅성거림, 야간집회에서 들리는 연설소리, 파업노동자들의 투쟁구호. 이것들이 쌍용자동차 공장을 뒤덮었던 소리들이다. 누구나가 소음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을 이 혼합된 소리들의 동시성을 백남준이 작곡하고 연주한 음악과 비교하는 것은 지나칠 것인가? 쇤베르크를 맑스와 결합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던 백남준의 음악을 듣는 것은 인내를 요구한다. 아니다. 인내보다 주의깊음을 요구한다라고 해야 한다. 주의깊은 귀는 음의 세계에서 추방된 소리들, 배제의 음성들을 들을 수 있다. 청음과 소음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는 것은 소리세계의 온전성을 회복하는 것이며 소리 세계를 가르고 있는 분단선을 철거하자는 것이다. 소음을 예술음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예술개념 그 자체의 혁신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예술실천 자체의 변혁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 역사적 인간은 그 시대 속에서 특정한 음만을 음으로, 나머지를 비음이나 소음으로 인식하도록 훈련받는다. 소리감각은 역사적인 것이다. 맑스는 모짜르트를 들을 수있는 귀가 역사적 노동의 산물이라고 했지만 삶을 가로질러 흐르는 온갖 소리들을 예술음으로 들을 수 있는 귀도 역사적 노동의 산물이라고 해야 한다. 소음을 예술로서 주목하는 것은 바우만이 쓰레기들이라고 불렀고 아감벤이 호로사케르라고 불렀던 존재들을 무력존재로 보지 않고 마치 맑스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이름을 통해 그렇게 했듯이 이들의 존엄과 힘과 절대적 특이성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다. 이것은 바흐찐이 장편소설론에서 시장의 웅성거림(多聲)에 기울였던 주목을 다른 역사적 조건 속에서 다시 시작하는 일이다.

4. 백남준은 정확히 누구나가 예술가인 시대를 예상(prefigure)하고 있다. 권력자 앞에서 바지를 내린다거나, 소머리를 잘라 전시장 앞에 내건다거나 피아노나 바이얼린을 파괴하는 것은 예술세계의 금기를 깨는 것이다. 금기의 파괴, 금기에 대한 테러. 그런데 금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금지되고 있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두려워 기피하는 것이다. 금기에 의해 짜여진 세계는 이미 테러에 의해 조직된 세상이다. 금기된 것을 피해 만들어진 예술은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뭔가를 테러하는 예술이다. 그러므로 모든 미-문학, 미-회화, 미-음악은 추하다고 간주되는 것에 대한 테러이다. 그것을 통해 추들(소음들, 보기 싫은 것들, 더듬대는 말들, 요컨대 소외되고 힘 없는 존재들, 말할 수 없는 서발턴들)은 배제되며 가시계 밖으로 밀려난다. 마치 대도심에서 노숙자들이 쉼터로 감춰지고, 반대자들이 감옥으로 감춰지고, 불안정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지하골방이나 후미진 외곽으로 감춰지듯이. 그리하여 대도시가 빌딩들의 숲으로, 번득이는 자동차들의 물결로, 가진자들의 으쓱대는 몸짓들로 가득차듯이. 이곳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이 위조된 세계의 냉혹함에 대해 테러충동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상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백남준은 이 위조된 예술세계, 대도시세계의 경계 밖으로 관객과 청중들의 관심과 시선을 돌리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이 백남준 예술 스파이의 독특한 작업방식이었다.

5. 누구나가 예술가인 시대라는 표어가 갖는 의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보지 말고 그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달을 보자는 것, 아니 그 달이 바로 우리 자신을 가리키고 있음을 보자는 것이다. 고전적 예술가임을 자처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전시, 출판, 연주될 것을 예상하고 추구하고 또 그것을 권리로서 요구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고도 골방에 숨겨두고 혼자 흘깃대며, 시를 쓰고도 일기장에만 남겨두고 노래를 흥얼대다가도 누가 들을까봐 곧 멈춰버린다. 저자author로서의 권위authority있는 예술가의 존재는 다중을 비예술가로 만든다. 기존의 예술제도를 통해 다중의 예술적 능력은 억압된다. 노동과정의 예술화는 중대한 분기점이다. 이 억압이 지속될 수 없다는 것, 다중이 바로 예술적 능력의 원천이자 담지자이자 발휘자라는 사실을 실제로서 입증해 주기 때문이다. 수많은 UCC에서 우리는 다중의 예술능력을 확인한다. 현행의 UCC들은 잠재적 UCC의 극히 일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일상을 돌아보자.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은 뭔가 서로 이야기와 표정을 주고받으며 음식을 접시에 들고 나르고 몸이 부딪치지 않도록 피하고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고 계산을 하고 상을 닦고 있다. 컷트! 무한히 반복되는 것으로 보이는 이 삶을 잘라 그 단면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그곳에 복잡한 시간들, 계략들, 흐름들의 연결접속, 분리접속, 통합접속이 있다. 손님들은 식사를 마치고 포만감을 느끼며 식당을 나가지만 음식의 맛과 쾌감까지 갖고 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기억 속에 남을 수 있겠지만 잘라진 삶의 그 단면 속의 사건으로 끝난다. 왜 우리들은 일상을 아름다움으로 감각할 수 없게 되었을까? 왜 아름다움을 미래의 것으로 연기시켜놓게 되었을까? 그래서 백남준조차도 Tomorrow, we will be beautiful!이라고, 즉 내일에서야 우리가 아름다울 것이라고 말하게 되었을까?  아름다움을 내일로 연기하는 것, 그래서 오늘 아름답지 않아도 견디도록 만드는 메커니즘이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즉각적으로 매순간 아름답고자 하는 예술실천, 다시 말해 Now, we are beautiful!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단호한 결단이야말로 새로운 혁명의 대원칙이다. 이것이 현실수긍주의, 실증주의, 정치적 순응주의의 나락으로 빠지는 길은 아닐까? 그럴 염려는 없다. 우리는 더 아름답고자 하며 새롭게 아름답고자 하고 아름다움의 도약은 한도 끝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6. 다중은 기술의 새로운 용법의 발명자일 것이고, 비가시적 물질이나 에너지의 저장고이자 운반자일 것이며, 오래된 담들을 넘어 흐르는 파쿠르(parcour) 능력자들일 것이다. 차이들의 하이브리드가 다중일 것이다. 고전적 예술가의 예술행위에서 하이브리드는 실험에 머무른다. 만약 그것을 예술의 고유한 형태로 이해하고 그것에 고착된다면 그것은 중생계를 자신의 외부로, 오브제로 남겨놓으면서 반복되는 매스터베이션과 유사할 것이다. 어떻게 좁은 예술가 작업실을 넘는 다중적 하이브리드가 가능할 것인가? 자연-기계-인간 사이의 하이브리드는 근대사회, 근대공화국을 규정하고 있는 위계제 동형성(isomorphism)을 깨지 않고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것을 깨는 경향은 강력하고 그 강도는 되돌릴 수 없을 정도이다. 백남준의 예술이상의 실현은 다중예술의 개진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다중예술의 개진이라니? 그것은 삶을 예술의 아뜰리에이자 무대로 만드는 실천이다. 그리고 꼭 따로 해야 할 말이지만 이것에는 캔버스보다 아주 넓고 크며 스크린보다도 넓고 크며 1003개의 모니터를 결합한 작품 <다다익선>보다도 더 커서 낡은 눈이나 귀로는 보고 들기 어려울 작품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사건적 작품으로 식별할 수 있는 예술감각의 형성과 단련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혁명적 예술가에게 역할이 있다면 바로 이 형성과 단련의 과정에 함께 하기 위해(스스로 배우면서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함께 한다'이다) 도우면서 예술계에서 예술수단들과 예술능력들을 훔쳐내는 일이 아니겠는가?

7.그러므로 백남준을 새로운 기법, 새로운 장르, 새로운 스타일의 개척자로 한정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가 던진 문제들의 상당부분을 덮어버리는 일이며 그의 가능성의 핵심을 실현불가능한 것으로 단정하는 해석방식이 되고 말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를 혁명가로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2009/09/05 10:21 2009/09/05 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