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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주의의 타나토스적 충동에 대하여
Posted at 2010/02/26 17:18// Posted in 쓰기(skribi)/사회운동_S"자연의 순리에 자신들의 삶의 욕구를 적응시키는 근본적으로 겸허한 태도와 감수성이야말로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자질이다. 또, 그러한 감수성이야말로 모든 진정한 문학적 감수성의 본질일 것이다. 지금 보는 것처럼 오로지 기술의 힘에 의하여 위기를 해결하려고 한다든지, ‘안락을 위한 전체주의’를 유지하려고 한다든지 하는 것은 결국 인간성의 황폐화를 불가피한 귀결로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심각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대문명은 끊임없이 고치고 부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어 편리함과 효용성, 경제적 가치만이 현대문명이 섬기는 유일한 가치가 되었다. 이제 이러한 것에 대한 전면적·근원적 비판과 도전이 절실하다. 세계는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가만히 귀를 기울여 할 존재다. 그것이 구원의 길이다. 모든 것을 일차원적인 유용성 속에서 평가하는 상황에서는 결국 자연도 황폐화되고, 인간도 타락할 수밖에 없다. 이제 ‘쓸모없는 것’을 기리고 찬미하는 정신적 공간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인간이 과연 어떤 상황에서 가장 행복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를 깊이 성찰하려는 노력과 결국 같은 것이다. 그동안 문명은 끊임없이 세계를 정복함으로써, 사회적 약자와 자연을 누르고 부려먹음으로써 행복의 크기를 증대시키려고 무작정 달려왔고, 그 결과는 지금과 같은 사회적·인간적·생태적 재앙으로 귀결되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투적인 가정, 논리들을 철저히 뒤집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개안(開眼) 혹은 회심(回心)이다. 그리고 이것이 불가능을 향한 문학의 도약대다."(강조는 인용자)
삶의 욕구와 분리된 자연의 순리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일 것이다. 우리는 바로 지금 삶의 욕구와 분리된 하나의 순리, 자본이라고 불리는 법과 순리에 "적응"하는 "겸허한 태도와 감수성"에 젖어 있다. 축적하라, 축적하라, 축적하라는 명령 앞에서 우리들은 너무나 고분고분하고 겸손하다. 순종과 겸손의 덕목이라면 우리 시대의 인간들이 결코 뒤질 덕목이 아니다. 부자가 되라는 명령을 떠받들기 위해서라면 혀밑 근육을 자르고 장기를 잘라 팔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며 신체를 성형하는 데 어떤 주저도 없다. 이것이 살아있는 자들의 죽은 삶을 규정한다. 김종철이 현대 문명이 경제적 가치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을 비판할 때, 그것을 '현대 문명은 경제적 가치만을 섬긴다'고 표현할 때, 그것은 바로 이 자본에 대한 섬김과 복종의 문화를 지칭한 것이리라.
그런데 경제적 가치에 대한 섬김은, 김종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유용성에 대한 섬김이 결코 아니다. 유용성은 경제적 가치, 교환가치(가치)의 축적에 종속된다. 유용성은 가치창출과 가치축적의 수단이지 결코 목적이 아니다. 유용한 것들, 쓸모 있는 것들을 찬미하는 것과 현대 자본주의 문명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 또 축적은 "행복의 크기를" 증대시키는 것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가치는 사회적 개인들이 대화하는 방식이며 그들의 언어이다. 우리의 사회는 양적 가치로서의 교환가치를 가지고 조직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사회의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려는 만인의 투쟁을 불러오고 축적의 메달따기에 전 삶을 바치도록 만든다. 아직 인간은 교환가치 외에 현대 사회를 조직할 다른 대안적 가치를 발명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 이것이 사회적 인간적 생태적 재앙이 지속되는 조건이다.
이 상황에서 김종철은 자본이 아니라 자연을 섬기자고 제안한다. 자본에 대한 충성과 섬김 대신 자연에 대한 충성과 섬김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게걸음을 치자는 것이다. 생명은 주어진 것에 순종하는 힘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초과/잉여의 힘이다. 특히 인간은 주어진 자연을 "끊임없이 고치고 부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진화한 류이다. 그것을 달성하는 수단이 기술이었다. 기술은 섬김을 거부하고 복종을 거부하면서 획득한 인간의 사회역사적 능력이다. 아니 기술은 생명이 스스로를 조직하는 방식이다. 유전자부터가 정보요 기술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자연존재임을 벗어났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은 새로운 자연이다. 김종철은 이 새로운 자연이 주어진 자연(엄밀한 의미에서 주어진 자연이란 없고 모든 자연은 만들어진 것이다) 앞에 머리숙이는 길만이 개안의 길이라고 제안한다. 이것은 인간을 무력하게 하고 산 것을 죽이는 다른 방식이 아닐까? 타나토스(죽음)의 충동이 이 논리를 휘감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태, 생명의 이름으로 죽음과 무기력을 제안하는 것이지 않을까? 기술의 자본주의적 전유와 기술 일반을 혼동할 때, 자본주의적 문명과 문명 일반을 혼동할 때, 우리가 인간적 생명을 송두리째 제물로 내놓아야 하는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아닐가?
반기술인가 기술의 대안적 사용인가
Posted at 2010/02/24 02:41// Posted in 쓰기(skribi)/사회운동_S원시주의는 원시적 삶으로의 복귀를, 농본주의는 자영자급자족적 소농생활로의 복귀를 강조하며 생태주의는 인간의 생태에의 종속과 적응을 주장한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인간 진화 과정에 대한 성찰과 반성에 대한 요구를 포함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지금까지의 진화과정이 드러낸 본말전도, 사물화와 물신화에 대한 거부를 함축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 경향들은 대개의 경우 자본관계보다 기술 자체, 문명 자체, 공업 자체, 도시 자체를 문제 삼는다. 과학과 기술이야말로 파괴하고 타도해야 할 주요한 적으로 설정된다. 유나바머가 그랬다. 그는 자본관계보다 대규모 기술을 더 큰 적으로 삼았다. 그가 과학기술자들에게 우편물 폭탄을 보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자본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기술에 대한 반대를 중심에 놓을 때, 다시 본말은 전도된다. 기술은 인간 지성의 조직화이며 인간 능력의 펼쳐진 책이다. 기술을 적대한다는 것은 인간을 적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과학과 기술(수단, 도구, 기계에 이르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매개 장치들, 그리고 예술)을 통해, 그것을 노동과정에 적용하는 것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잠재력을 입증해 왔고 온갖 환상과 미신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기술의 악마적 효과는 바로 기술 자체의 효과가 아니라 기술의 자본주의적 사용의 결과이다. 축적을 위한 기술만을 중점적으로 개발하고 개발된 기술을 축적을 위해서 주로 사용한 결과 기술은 물구나무 선 진화를 계속해 왔다. 생명을 살리는 기술보다 죽이는 기술이 더 많이 발전해 왔다. 기술이 인간을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니라 자본을 위해 인간파괴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은 생태중의 생태이기 때문에 자연 파괴 이전에 인간 파괴(가난, 전쟁, 질병, 감금, 등)가 먼저 그리고 깊숙이 진행되었다. 인간과 삶을 위한 기술은 부차적이고 지엽적인 문제로 되어 왔다.
우리는 기술에 반대할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기술이 생태보호를 위해 이용되고 인간과 삶을 위해 이용될 것을 주장해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생태는 인간 자신이다. 인간보다 빌딩을, 화폐를, 수익을 더 좋아하는 체제는 인간과 자연을 위해 기술을 개발하고 사용하는 데 인색하다. 그것이 축적이 도움이 될 때에만 그렇게 한다.
기술의 자본주의적 사용이 낳는 문제점들을 기술 일반의 문제로 오인할 때, 반기술주의가 자라나온다. 인간의 욕망은 맹목적인 그 무엇이 아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미 생태를 보호할 필요성을 느끼고 맑은 공기, 깨끗한 물, 유기질의 토양을 욕구한다. 이것은 앞서 말한 '자연으로의 복귀' 경향을 자극하는데 이것은 생태보호 기술의 한 유형으로 파악해야 한다. 생태운동의 발전으로 인해 자본도 그것에 적응하는 기술에 관심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후 문제는 노동의 관심만이 아니라 자본의 관심으로도 되고 있다. 암치료에서도 화학요법에서 면역요법과 세포요법으로의 이행이 나타나고 있다. 자연과 생태에 대한 관심은 과거로의 단순한 복귀가 아니라 인간의 기술적 지성적 조직적 능력을 통한 자기정화의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생태보호를 위한 자연성의 회복과 탈근대적이고 지극히 문명적인 요소들의 결합을 올바르게 사고할 수 있다. 1
한 인격 속에 한 평이라도 넓고 조금이라도 좋은 아파트를 확보하고 싶다는 욕망과, 건강에 유익할 공기와 물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는 공존한다. 자본주의의 모순적 발전은 한 인격 내부에도 모순적인 욕망들을 불러일으킨다. 더 넓고 쾌적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이 곧 탐욕인 것은 아니다. 더 나은 삶, 다른 삶에 대한 욕망을 억제하고 통제하는 것을 통해 자유가 쟁취될 수는 없다. 협소한 자급자족적 공동체의 삶은 류로서의 인간의 가능성을 닫는다. 소규모 공동체들이 자급자족적이면 그럴 수록 타자들과의 교류와 소통은 부차적이고 우연적인 일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반지성적이고 반문명적인 삶은 문명적이고 지성적인 삶보다 더 억압적일 수 있었음은 지난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자본주의에서 교환으로 나타나는 교류는 인간 진화의 결정적 요소이며 인간의 사회적 역능을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오늘날 가능하고 유일한 공동체는 류로서의 인간의 공동체, 전 지구적 공동체이다. 물론 이것은 소규모 공동체를 배제하는 개념은 아니다. 전 지구적 공동체에서 이들 소규모공동체들 사이의 교류는 결코 우연적이고 예외적인 것일 수 없고 오히려 필연적인 성격을 띨 것이다. 기술과 문명은 위험요소로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활력으로 기능할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과거로 돌아갈 것인가에 있지 않고 어떻게 인류사에 지금껏 존재한 바 없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존재들(의 특이한 역능들) 사이의 공통관계를 확립할 것인가에 있다. 현대의 국가는 근대 이전의 작은 공동체를 대체한 환상적 공동체이다. 작은 공동체로의 복귀인가 국가보다 더 큰 공동체로의 전진인가? 공동체를 환상적 성격의 것으로 내버려 둘 것인가 그것을 실질적인 것으로 만들 것인가? 이것이 우리 시대에 공동체 문제를 둘러싸고 제기되는 주요한 두 가지 문제이다.

- 이와 관련해서는 자연적인 것과 기술적인 것을 결합하려 한 라다크 부흥계획이 참조될 수 있을 것이다. [Back]
우리가 위기다 We are the Crisis
Posted at 2010/02/23 06:15// Posted in 쓰기(skribi)/사회운동_S우리가 위기다
캘리포니아 점거운동에 대한 보고서
http://zinelibrary.info/we-are-crisis-report-california-occupation-movement
캘리포니아에서는 아이들이 벽에 "모든 것을 점거하라!"고 쓴다. 그들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말라!"고 쓴다.
2. 9월, 10월, 11월
한 마디로: 2009년 11월 18-22일에 "운동"은 "점거운동"이 되었다. 버클리 대학 3일 파업의 마지막 날인 11월 20일에 학생들은 바깥에 모여서 휠러관(Wheeler Hall)을 점거했다.
3. 소용돌이: 휠러
"공교육을 구하기" 위한 운동은 사적 소유를 공유화하려는 전투적 욕망과 (무기한으로) 식별불가능하게 되었다.
4. 부수적 피해
경찰의 환상적 권력은 사실상은 갇힌 사람들(people inside; 안에 있는 사람들)의 권력이다. 해방된 사람들(people outside; 밖에 있는 사람들)의 권력(즉 사람권력 power of people)1은 소유의 지배를 정지시키는 것이다.
5. 공유화하기
가르치기(instruction)보다 건물짓기(constrcution)를 더 좋아한, 좀더 거칠게 말해, 사람보다 빌딩을 더 좋아한 버클리 대학2의 번영을 고려하면, 학생들이 빌딩을 저항의 장소로로 설정하려 한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점거들은 자본주의의 시공간 속으로의 물질적 개입으로 일어난다.
6. 우리가 위기다
진정한 변증법은 부정과 실험 사이에 있다. 저항과 거부의 행동이 새로운 사회관계를, 시공간에 대한 새로운 용법을 가능케 하는 것에 있다. 대치가 없으면 실험들은, 그것들의 배경을 형성하는 기존 사회관계 속으로 주저앉을 위험이 있다. 그것들은 단순한 생활스타일이나 문화로 될 위험이 있다. 어떤 실험이 진정으로 시공간과 사회관계를 통제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은 반드시 권력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포함할 것이다. 3
낡은 것에 대한 부정이 없이는 새로운 것도 없다. 반면 새로운 것을 창발시키기 못하는 것은 낡은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불화의 프로젝트, 거부의 대학, 연구하고 파괴하기(R&D), 반자본 프로젝트. 부정의 수사학은 바리케이드의 위상학과 합치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원한다. 이 부정은 표류로 되었다. 총체성에 대한 욕망은 전부가-아닌-것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바로 그 위기이다. 이것은 "운동"을 긍정할 수 있는 유일한 감각이다. 우리가 권력이다Nous sommes le Pouvoir. 이것은 68의 슬로건이었다. 이 슬로건은 "우리"의 역량을, 연대의 긍정적 권력을 부각시킨다. 우리가 위기다We are the Crisis는, 우리의 존재를 파국에, 일정한 정도의 무기력에, 우리의 능력 밖에 있는 통제할 수 없는 조건들에 연동시키면서, 이 권력의 일부를 양도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우리가 위기다는 우리를 징후이자 동시에 처방으로 새긴다. 그것들의 얽힘을 피하려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 얽힘(우리의 조건)이 권력 자체의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가 권력이다는 집단적 역량으로부터 집단적 역량을 위해 쓴다. 우리가 위기다는 저항하며 자본의위기 속으로 객관적 조건 속으로 실험아는 집단이 쓴다. 어원적으로 위기crisis는 규정, 결정을 의미한다. 그 슬로건은 단지 경제의 "표현"일 뿐인 "우리"에 대한 어떤 목적론적 규정도 갖지 않는다. 우리we에 대해 결정하는 것, 자본의 객관적 조건 내부에 있으면서 그것에 대항하는 징후이자 처방으로서의 집단에 대해 결정하는 것, 이것이, 현재의 점거 운동이 저 객관적 조건들을 파열점으로 밀어붙이려고 시도하는 결정의 벡터이다.
http://howtheuniversityworks.com/wordpress/archives/231

더 나은 삶과 대안의 실제성
Posted at 2010/02/09 08:22// Posted in 쓰기(skribi)/사회운동_S자본주의적 관계들이 이룬 삶보다 더 나쁜 삶을 가져오게될 모든 혁명은 결국은 실패한다. 자본주의는 이윤논리에 눈멀었지만 가부장제와 성차별, 궁핍과 고통, 인신적 예속, 인종적 지역적 민족적 편협성, 국가적 억압 등을 실제적으로 극복할 잠재력을 축적했다. 물론 그 잠재력이 이미 충분히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니 현실에서는 나열한 문제들이 더 악화되고 나빠진 상태를 체험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만 국지적이고 모순적일 뿐인 그것들의 실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실현할 잠재력의 실재성(에 대한 직관)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섣부른 비판에 동의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착취, 수탈, 강도, 사기에 의지하고 있고 그것이 낳는 결과들이 끔찍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많은 비판들에 다중들은 냉소적이거나 혹은 자본주의에 별 일이 없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서 그 비판들을 수용한다. 여기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적이고 종교적인 비판뿐만 아니라 합리주의적인 비판도 포함된다. 그 비판들이 자본주의의 현실태를 정확하게 꼬집고 있을 때조차 실제로 그러하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종교적이어서는 안 되고 자본주의를 비종교적 종교로서 철저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비판은 그러므로 현실태에 대한 비판만으로는 부족하고 그것의 잠재력에 대한 비판을 포함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현실태를 비판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그러나 그것의 잠재력을 비판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이 성장의 약속을 하고 있기 때문이고 불평등하고 모순투성이이지만 성장을 실제적으로 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 분배만으로 대응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자본주의의 잠재력을 파괴하거나 축소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그것의 합리적 핵심을 살리면서 동시에 그것의 모순과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장에 반성장이나 분배를 대치시키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자본의 성장에 삶의 성장을 대치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비판이란 실제적 대안성의 제시,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의 제시에 이를 때에만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살리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중요한 입지점이 될 수 있지만 생산력의 파괴와 축소를 받아들일 것을 제안하는 현재의 농경주의적 생명주의 비판이 대안적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 중요하지만 복고적 이슬람주의가 대안적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1
오늘날 자본주의 제도교육은 명백히 부패했지만 대안적 교육기관들이 교육 소매상들처럼, 맑스가 말한 바 있는 철학적 소기업들처럼 소그룹으로 나누어져 뒷골목에서 열심히 작업하는 데 머무르는 한에서는 아직 대안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오늘날 세계시장으로 나타나고 있는 세계지평은, 그것이 어떤 문제를 안고 있다 하더라도 인류가 수천, 아니 수만년의 역사적 고투를 통해 도달한 지점이다. 그러므로 세계성을 살려나갈 능력이 없는 모든 것은 필요하고도 충분한 대안력을 갖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클린턴이 알카에다를 성격규정하면서 사용한 용어, 관민족적 비국가 네트워크(transnational non-state network)는 비판의 무기를 무기의 비판으로 전환시키는 일에 중요한 시사점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다중지성에 적용한다면 "관지성적 비학교 네트워크"일 것이다.

- 하지만 알카에다와 같은 조직 모두를 복고적 이슬람주의로 취급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알카에다나 탈레반이 어떻게 미국과 같은 거대 국가를 위협하는 '관민족적 비국가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는지, 그 동력과 관점이 무엇인지는 연구주제가 되어야 한다. http://is.gd/7Ybru 참조. [Back]
중국의 민공
Posted at 2010/02/04 20:47// Posted in 쓰기(skribi)/사회운동_S한글본: 사회실천연구소, 『실천』, 2009년 10월호
중국의 민공들은 농민도 노동자도 아닌 디아스포라 존재이다. 그래서 이 글은 민공을 이주노동자로 번역하고 있다. 이주는 국경 사이에만 있지 않고 국경 내부에도 있다. 2억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는 이들 민공은 열악한 노동조건, 낮은 임금, 높은 산재, 사회적 보호상실, 열악한 생활조건, 차별과 고립에 시달린다. 좋은 일자리들은 도시노동자들에게 예약되어 있고 농촌은 생계에 충분한 보상을 제공하지 못한다. 이들은 같은 마을 출신들이라는 출신네트워크에 입각하여 취업하고 투쟁하지만 농촌에 작은 땅뙈기가 있다는 것 때문에 투쟁이 안정되거나 지속되지 못한다. 이들의 투쟁은 도시노동자들(공렌)의 투쟁, 실업자들의 투쟁(샤오강)과 다른 독특한 흐름을 구성한다.이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지가 중국 사회의 커다한 변수이다.
기본소득에 대한 여섯 가지 테제
Posted at 2010/01/28 06:36// Posted in 쓰기(skribi)/사회운동_S첫째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며 또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다른 원리를 제안하는 것이다. 기본소득의 원리는 자본주의의 착취/수탈 원리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원리이다. 그것은 흔히 사회정의, 평등 등의 이념적 용어나 보편복지 등의 사회적 용어로 설명되곤 하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을 류로서 구축하는 주체성의 원리, 즉 인류성의 원리이다. 자본주의가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를 원리로 하는 한에서 그것은 인간을 류로서 정립할 수 없다. 인간들 내부에 분열을, 그것도 적대적 분열을 도입하기 때문이다. 반면 기본소득의 논리는 그 분열과 간극을 넘는 소득의 유동성을 제도화함으로써, 그리고 기본적 소득 획득을 통한 삶의 안정성과 자유를 제공함으로써 적대로 인한 인류성의 제한을 타파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기본소득은 그 원리에서, 특이한 개개인들이 소득수준, 직업, 신분, 성별, 연령, 인종, 지역, 소속 등을 넘어 공통된 류로서 자신을 재구축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장치이다. 기본소득을 통해 각각의 개개인은 시민이나 공민(국민)임을 넘어 인류인의 차원을 획득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오늘날 통합된 세계자본주의의 문제를 타개해 나가기 위해 필수적으로 주어지는 요건이다.
둘째 기본소득이 인류 및 인류인의 구축으로 사고될 때 그것은 결코 지역적, 일국적 수준에서는 완성될 수 없고 전 지구적 수준에서만 실제적으로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지역이나 국가를 기본소득의 예외지대로 남겨둔 상태에서 기본소득은 실효성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의 기본소득은 그 재원이 설령 해당 국가나 지역의 정치공동체에서 지불된다 할지라도 (현대의 세계시장적 조건을 고려하면) 기본소득을 향유하지 못하는 지역 주민들로부터의 잉여이전일 가능성을 항상 내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구적 수준에서의 분열을 용인할 뿐만 아니라 조장하는 것으로서의 '기본소득'은 오래 전 레닌이 노동귀족이라고 불렀던 층이 향유한 일정한 특권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것은 기본소득 쟁취운동이 지역적 수준이나 국가적 수준에서 시작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수준들에서 기본소득 쟁취운동이 시작되더라도 전 지구적 차원에서의 기본소득이라는 시각을 결코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셋째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내부에서의 개혁방안이지만 이것은 또한 인간혁명의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요소로 이해되어야 한다. 기본소득이 개혁방안이지만 그것이 자본주의와 이질적인 원리에 입각한 개혁방안임이 주목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착취원리와 기본소득운동의 인류구성원리는 대칭적 구도에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양자가 대칭적 대립관계에 있다면 우리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기본소득을 제안할 수 없을 것이다. 양자는 비대칭적이며 서로 다른 발전경로를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양자는 무관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착취 원리가 인류구성 원리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착취는 인류구성의 역사적 과정, 인간들의 공통되기에 대한 착취였고 이 점은 오늘날의 인지자본주의하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구성의 발전경로로서의 기본소득은 자본주의적 착취와 직접적으로 대립하지 않는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본소득을 구매력 제공을 통한 성장논리(즉 착취논리)의 한 요소로 사고하고 또 이것이 일면에서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하지만 성장논리 속에서 기본소득이 고려되는 한, 기본소득에는 제한이 가해지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의 기본성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적 성장은 결코 일관될 수 없고 파동을 치며 성장에 불리한 국면에서는 기본소득에 대한 침식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기본소득 획득을 위한 노력은 아래로부터의 운동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그것이 위로부터의 정책으로 나타날 때조차 아래로부터의 운동에 뿌리를 두지 않는 한 무력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기본소득이 주체성의 구축, 인류성의 건설을 향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주체성 구축과정으로부터 유리된 상태에서 위로부터 시혜적 온정주의적으로 주어지는 소득은 대중통제의 수단으로 활용되기 십상이다. 그 소득에 (자산심사나 노동요구 등) 어떤 조건도 달려 있지 않을 때에도 한 가지 조건, 그 소득의 공여자가 권력이라는 조건만은 제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권력의 유지가 대중의 삶의 유지를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 될 때 권력에 의한 대중통제는 용이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은 운동으로서, 즉 사람들 사이의 공통성을 실질적으로 인식하고 실천하는 과정으로서 조직되어야 한다. 요컨대 기본소득운동은 다중들이 자본이라는 축적된 죽은 노동을 재전유하여 삶의 산 피로 재가공하는 코뮤니즘적 유동화의 운동이어야 한다.
다섯째 자본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혹은 자본의 성장을 도모하는 방향에서 기본소득이 보장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우리는 이 양자가 직접적 대칭적으로 대립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자의 적대성이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은 하루하루 자신의 몸을 팔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며 그렇기 때문에 착취, 수탈, 강탈, 사기 등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몸 팔 사람들을 만들어 왔다. 몸을 팔아야 하는 강제는 생활수단의 부족에서부터 발생한다. 기본소득운동은 기본적인 생활수단을 어떤 조건도 없이 제공함으로써 원리적으로 몸을 팔아야만 하는 강요된 상황을 제거하는 것이고 바로 이 조건에서 삶의 창조성에 실질적 자유를 보장할 필요를 선언하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장에 대한 전혀 다른 개념이 창안되어야 한다. 자본의 성장이 아니라 삶의 성장이 문제이다. 나는, 삶이 실질적으로 자유로와지면 노동유인이 감퇴될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1 그것은 자본주의적 강제노동이 계속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자본가적 세계상을 기본소득 개념에 투영시키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삶을 강제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수준이 된다면 오히려 노동은 삶의 내적 욕구로 되어 무한히 다양한 노동들이 창발될 것이다. 자본에게 문제인 것은 이 다양한 노동들이 점점 자본의 축적 원천으로 기능할 수는 없게 되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가치화로 이 새로운 생산과 성장의 흐름을 가치화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이 자본주의 내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설득하는 외교론적 노력과는 별개로 자본가들의 저항과 공세에 대항할 실질적 주체성과 힘을 조직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점점 공통되는 삶의 활동들을 조절할 전혀 다른 가치원리의 필요성이 대두될 것이다. 기본소득운동의 실제화는 자본주의적 가치성장을 부적절한 것으로 만들면서도 공통적 부의 성장, 삶의 행복의 성장과 선분배를, 진정한 공통복지를 가능케 할 것이다.
여섯째 하지만 기본소득은 결코 만병통치약이 아니며 몇 가지 집합적 요구의 하나로서 제시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행장치로서의 기본소득이 인류성의 구축으로서 사고되는 한에서 그것은 전 지구적 시민권의 쟁취 없이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불구적일 수밖에 없다. 또 오늘날 집단적 생산수단인 정보재에 대한 일반적 접근권이 쟁취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생산능력은 억제될 것이고 (기본소득 재원 부담이 늘어나는 것과는 별개로) 공통화는 그만큼 지체될 것이다. 또한 생태계에 대한 사유화의 축소와 공동영유권의 확장 역시 기본소득으로 인한 소비증가 우려를 불식시킴과 동시에 인류성의 구축을 인간중심주의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인간해방을 인간으로부터의 해방과 결합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본소득운동은 삶의 자유와 행복의 제도화를 위한 (이와 연관된) 몇 가지 다른 집합적 요구들과 공동으로 제기될 때 그 실효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 빠레이스도 곽노완도 모든 경제적 소득이 기본소득으로 분배되면 노동유인이 감퇴되고 결국 미래의 경제적 몰락이 불가피해지고 기본소득은 축소되어 지속가능하지 않게 된다고 생각한다.([글로벌 시대의 지속가능한 유토피아와 기본소득], 160쪽) [Back]
[전달]1.15 왕십리 뉴타운 동절기 강제철거 규탄 성명
Posted at 2010/01/18 22:40// Posted in 쓰기(skribi)/사회운동_S[1.15 왕십리 뉴타운 동절기 강제철거 규탄 성명]
살인적인 동절기 강제철거 즉각 중단하라!
얼마나 더 죽어야 하는가! 지난 1월 15일 새벽, 왕십리 뉴타운지구에서 살인적인 동절기 강제퇴거가 자행되었다.
1년 가까이 장례도 치르지 못한 용산참사 철거민열사들을 보내드린지 일주일 만에, 지난 12월 동절기 강제철거에 떠밀려 60대 용강동 철거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한 달 만에, 또 다시 이명박 정부와 오세훈 서울시장은 철거민들의 죽음을 강요하고 있다.
특히 이번 왕십리에서의 자행된 동절기 강제퇴거에서는 단 두 건물에 대한 명도를 진행하고자 백 여명의 용역깡패들이 동원됐다고 한다. 게다가 두 곳 중에는 작은 가게에 주거를 겸하고 있는, 70대 노부부의 마지막 생존공간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깜깜한 영하의 추운 새벽에 아무런 저항의 능력도 없는 70대 노부부에게 행해진, 폭력적인 강제집행은 자칫 또 다른 죽음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었기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언제까지 세입자 보호를 운운하는 뻔뻔한 거짓말을 지속할 것인가! 이미 지난 2008년 11월 서울시는 동절기 강제철거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며, 세입자 보호에 나서겠다고 언론에 홍보하며 약속했었다. 그러나 그 후 서울지역 수많은 곳에서 동절기 철거가 자행되었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거짓말과 변명으로 일관해 왔다. 법적으로 진행되는 명도는 막을 수 없다며 변명하기도 했고, 용산은 동절기 철거와 상관없다며 발뺌했으며, 용강동 철거민의 죽음 이후에도 동절기 철거는 없었다는 뻔뻔한 거짓말을 자행했었다. 이번에는 또 무어라 변명하며 거짓으로 넘어갈 것인가.
이미 한국의 강제퇴거의 현실은 국제사회에 큰 비난의 대상이 되어왔다. 동절기에 행해지는 퇴거 및 철거는 ‘반인권적인 행태’라며, 유엔에서 수차례 금지를 권고했었다. 그럼에도 역대 정권과 이명박 정권은 이를 철저히 무시로 일관해 왔다. 특히 왕십리뉴타운지구는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추진한 시범뉴타운 지구 이다. 이명박 정권은 경제성장과 주택공급을 운운하며 뉴타운/재개발을 포함한 광역개발을 빠른 속도로 밀어붙여, 대책없는 강제철거라는 반인권적인 행태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더 이상 죽이지 마라! 이명박 정권과 오세훈 서울시장은 도시의 세입자들과 가난한 민중들을 죽음의 벼랑 끝 ‘망루’로 몰아붙이는, 살인적인 강제철거를 당장 중단하라! 개발이득만을 위해 폭력도 죽임도 서슴지 않는, 핏빛 재개발정책을 전면 개정하라!
동절기 강제철거, 이명박, 오세훈 규탄한다!
살인개발 중단하고, 개발악법 철폐하라!
개발보다 인간이다! 철거민 주거생존권 보장하라!
2010년 1월 18일
빈곤사회연대
공공노조 사회복지지부, 관악주민연대, 광진주민연대, 노들장애인야간학교, 노숙당사자모임한울타리회, 동자동사랑방, 문화연대, 민주노동당, 민주노동자연대, 민주노총,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민중복지연대, 반빈곤네트워크(대구), 사회당, 사회진보연대, 성공회나눔의집협의회,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위례복지센터, 장애여성공감, 장애인실업자종합지원센터,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전국빈민연합, 전국실직노숙인종교시민단체협의회, 전국자활노동조합,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전국학생행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주거권실현을위한국민연합, 주거권실현을위한 비닐하우스주민연합, 중랑장애인자립생활센터, 진보신당, 천주교빈민사목위원회, 최옥란열사추모사업회, 피노키오자립생활센터, 한국백혈병환우회, 한국빈곤문제연구소, 향린교회, 홈리스행동(준)
공통소득
Posted at 2009/12/25 10:54// Posted in 쓰기(skribi)/사회운동_S그러면 노동자간의 경쟁도 임금률을 평등화하는가? 노동력 재생산비로서의 본원적 임금은 그 자체로서 평등주의적이다. 한 시대의 노동력의 재생산에 커다란 편차가 있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임금은 끊임없이 편차화된다. 성과제 임금의 도입은 그것을 극단화한다. 요컨대 임금은 본원적으로는 평등주의적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차등주의적이다. 자본들의 경쟁은 평등을 가져오는데 노동자들의 경쟁은 노동자들 사이의 불평등을 가져온다. 이것은 시장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불평등은 단결의 취약함의 결과이자 또 그것의 원인이 된다.
그러면 노동의 목적은 평등의 성취인가? 평등은 양적 개념이다. 만약 노동의 목적이 평등이라면 평균임금을 쟁취하는 것이 그 목표여야 할 것이다. 자본에게 평등은 서로간의 협상과 이해조정의 중요한 수단이지만 노동에게 평등은 조건 이상일 수 없다. 평등은 자유의 조건이어야 한다. 그리고 자유는 행복의 방법이 된다. 임금 평균화의 이상은 사회적 임금, 보장소득, 기본소득의 개념 속에 깃들어 있다. 소득의 평등(동등이 아니다) 없이 자유는 불가능하다. 즉 소득의 평등(재현)은 삶의 자유와 행복(표현)을 위한 조건이다. 여기서도 재현은 표현을 위한 계기이자 조건으로 작용한다. 이렇게 사회적 삶의 자유와 행복을 증대하는 데에, 다시 말해 다중의 공통되기에 복무하는 소득형태를 '공통소득'으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겨울 홍대 앞의 노점상
Posted at 2009/12/18 20:27// Posted in 쓰기(skribi)/사회운동_S다지원 동료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있던 중에 마포촛불연대로부터'홍대입구역 노점상과 철거용역 대치중이니 시간되는 분 홍대입구로 가 주세요'라는 문자메시지를 받고 홍대입구역으로 향했다. 홍대입구역 네거리는 공사중으로 분주하다. 횡단보도 표시가 지워진 거리에는 사람과 차들이 뒤얽혀 있다. 다시 보니 지하보도가 없다. 자유로운 영혼들의 그래피티가 볼 때마다 즐거움을 주었던 곳. 무엇으로 채웠는지 흔적도 없이 지워져 버리고 청기와주유소와 제일은행을 잇는 횡단보도가 생겨있다. 개발은 생명의 자취를 하나하나 지워나간다.
홍대입구역 5번출구에 도착하니 검정색 서부노련 차가 서 있고 그 뒤 쪽에 늘어선 대여섯 대의 리어카를 중심으로 노점상들이 물건들을 챙기고 있다. 이미 상황이 끝난 것이다. 그 중 한 대의 리어카에서는 한 아주머니가 남은 두부를 뭉텅뭉텅 쓸어서 아마도 싸우느라 식사때를 놓친 것으로 보이는 노점상들에게 나눠 주고 있다. 영하 몇 도의 차가운 날씨에 바람마저 세차다. 서부노련 차량 옆의 바구니에 거꾸로 쟁여져 있는 피켓이 상황을 말해준다. 다른 물건들에 뒤섞여 글자가 가려졌지만 아마도 '용역깡패 동원하여 생존권을 짓밟는 마포구청은 각오하라'는 문구인 듯하다. 예술과 문화의 지역 홍대 앞에 자본의 개발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마포구청의 폭력적 노점 단속을 규탄한다.
Posted at 2009/12/14 11:08// Posted in 쓰기(skribi)/사회운동_S마포구청에서 2억이나 들여 용역을 고용했다고 한다. 11월부터 매일매일 구청에서 고용한 용역들이 홍대 거리의 노점상을 하나씩 뒤엎고 있다. 오늘도 홍대 앞을 지나다가 어김없이 용역들과 노점상인들의 대치현장을 보았다.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처진 구두 발창들을 주워 담을 생각을 하지도 못한 채 멍하니 앉아있는 노점상인을 보았다. 공무원이 깡패라고, 이 얘기 좀 인터넷에 올려달라고, 먹고 살아야 하는데 우린 어떡하냐고 눈물짓는 아주머니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마포구청측의 입장은 이러하다. '디자인 거리 조성을 위해서 서교로 보도 폭을 넓힐' 계획이고 '노점은 불법이라서 단속해야 할 의무가 있다' 거리를 예쁘게 단장하기 위해서라면 못난 사람들쯤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충분히 쓸어버릴 수 있다는,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다. 더 아름다운 거리를 위해서 조직화된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휘두르는 일이 이 나라의 일상이 되어 가고 있다.
이 글에 나타나 있는 권력의 계획, 판단, 대책, 방법, 근거를 분석해 보고 그것을 해결할 대안에 대해 생각해 보자.
1. 마포구청의 계획: 디자인 거리를 조성하기 위해 서교로 보도폭을 넓힌다.
*권력이 예술주체가 되어 공간을 특정한 미관에 따라 디자인한다(환경디자인, 공공미술 등의 전문가와 권력의 결착).
*그것은 특정한 지역과 공간(여기서는 홍대 주변)을 정치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며 지역가치를 상승시키기 위한 것이다.
*오세훈의 창의시정(창조성에 입각한 도시정책, 창조성을 도시가치의 상승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 그 정책적 논거이다.
*거리를 어떤 디자인으로 조성할 것인지를 둘러싼 미적 투쟁이 필요한 지점이다. 이것은 미학 전쟁의 영역이다.
2. 마포구청의 판단: 노점상들이 거리미관을 해치고 있고 디자인 거리 조성에 방해가 되고 있다.
*노점상은 시각적으로도 홍대 앞 거리의 독특한 풍경을 구성하며 홍대 앞을 찾는 젊은이들의 소비세계를 구성한다.
*노점상은 거리미관을 해친다는 판단은 가난을 수치로 여기면서 가난의 실재를 숨기려는 권력자와 자본가들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물론 그 가난은 자신들이 권력유지와 치부를 위해 일상 속에서 부단히 만들어내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실재를 감추면서 꾸며질 디자인 거리의 계급성은 명백하다. 그것은 허위, 기만, 화장, 환상의 디자인일 것이다. 도시를 환상여행의 공간으로 조직하려는 술책일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도시의 당당한 일원이고 거리에서 자시의 삶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며 바로 그러한 생의 현실적 약동이 진정한 거리 디자인임을 주장하자. 아래로부터의, 삶으로부터의 디자인.
3. 마포구청의 대책: 노점상들을 거리에서 쓸어버린다.
*불편한 것들을 쓸어버리기. 1980년대에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은 사회주의자들을 쓸었다. 지금은 노점상을 쓸어낸다. 이주노동자도 쓸어내어 뒷골목을 헤매게 한다. 유태인에 대한 싹쓸이로 유명해 졌고 인종청소의 형태로 발칸에서 다시 나타났던 이 싹쓸이의 정치는 권력의 입맛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을 쓸어버릴 위험한 사상이다.
*지금 쓸어지는 것이 삶이며 만들어지려는 디자인 거리가 무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알리자.
4. 마포구청의 방법: 용역을 동원하여 노점들을 거리에서 강제로 추방한다.
*용역은 불안정노동자이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정리해고가 만들어낸 노동력 풀이다.
*용역이 용산, 쌍용 등에서 확인되었듯 재개발을 추진하고 파업을 깨고 남들이 손대기 싫어하는 일들을 해결하는 폭력조직이자 해결사로 동원되는 현실에서 용역 문제는 이제 다중들의 직접적 공동문제로 되고 있다.
*용역 대 노점상을 대결하게 하는 것은 다중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장치로 사용된다.
*무조건적 보장소득운동을 통해 자신의 몸을 용역으로 팔지 않더라도 삶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5. 마포구청의 근거: 노점은 불법이다.
*노점은 토지가 사유화되어 있고 국유지나 공유지조차도 사적인 것으로 이해될 때 불법으로 된다.
*토지가 사적 혹은 공적으로 소유되지 않고 다중의 공통의 공간으로 이해되는 조건의 창출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제헌능력으로 현행의 법을 불법화시키고 새로운 법을 창안해야 한다.
노점, 용역, 구청의 관계로 나타나는 이 사안은 사실상 우리 시대의 모든 문제들이 중첩되면서 나타나는 현장이다. 이 문제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들은 예술, 노동, 소득, 토지, 권력 등에 걸쳐 거의 아무도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어떻게 지역적 사안으로 나타나는 이 문제에 대한 다중의 공동의 대응을 조직할 수 있을까?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펌]빛과 그늘
Posted at 2009/12/08 13:28// Posted in 쓰기(skribi)/사회운동_S동영상 빛과 그늘
교육에 관한 네그리와 하트의 생각
Posted at 2009/12/07 21:58// Posted in 쓰기(skribi)/사회운동_S서노련은 무엇이었을까?
Posted at 2009/12/05 12:48// Posted in 쓰기(skribi)/사회운동_S참고기사: 심상정, 김문수 직격탄은 워밍업?
도시의 농업, 농장, 정원
Posted at 2009/11/30 00:38// Posted in 쓰기(skribi)/사회운동_S도시회피가 아니라 도시전복을 상상하게 한 점이 이 프로그램의 미덕이다. 도시생활에서 커다란 문제로 제기되는 음식생활. 음식정의와 음식자치는 지적 자치로서의 다중지성 운동 이상으로 자율주의 운동의 중요한 정치적 장으로 사고되어야 한다. 그 방법은 도시의 농장화, 도시정원의 육성, 시민과 농부의 혼종화이다. 텃밭운동은 어디서나 전개될 수 있다. 공공의 공터, 옥상, 베란다, 그리고 실내. 텃밭운동은 생명을 살릴 수 있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 하며, 공간혁명을 이룰 수 있으며, 시장경제로부터의 자율성을 확립할 수 있으며, 반자본의 주체성을 형성할 수 있고, 자본에 의해 압살되어버린 공통감각을 되살릴 수 있다.
이를 위해 텃밭공간을 창출하고(어디에!), 텃밭운영과 관리의 지식을 쌓고(무엇을 어떻게!), 텃밭과 연계될 수 있는 부문들을 찾아(어디로!) 부단히 자치공간을 확장해 나가야 한다. 지성의 텃밭을 만들듯이, 음식의 텃밭을 만들고, 삶의 텃밭을 가꾸는 것이 필요하다.
[관련링크]
돕헤드 행동하는 텃밭
http://blog.jinbo.net/dopehead/?pid=727
에코동 생태공동체
http://v.daum.net/link/3525875
로컬푸드운동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70913135927&Section=
생협텃밭운동
http://gocoop.org/board/bbs/board.php?bo_table=freeboard&wr_id=572&sca=%C0%CF%B9%DD
다중이 실패했다고?
Posted at 2009/11/28 12:22// Posted in 쓰기(skribi)/사회운동_S문: 촛불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는데요. 다중이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요?
답: 다중의 촛불봉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면 1987년의 노동자대투쟁도, 1980년 5월의 민중의 반란도, 1968년의 시민혁명도, 1935년의 민중반란도, 1917년의 볼셰비키혁명도, 1870년의 코뮌도, 뮌처의 농민반란도,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반란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예도, 농민도, 노동자도, 민중도 모두 실패했다는 의미를 함축하면서 다중의 실패를 추론하는 것인가요?
문: 촛불은 유독 아무 것도 얻은 것 없이 사라졌습니다.
답: 얻은 것의 정도로 혁명을 평가하려는 것은 혁명을 상행위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손에 뭔가 거머쥐는 것이 목적이라면 혁명을 하기보다 스펙을 쌓고 경쟁에서 이기고 뒷거래를 잘하는 능력을 키우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혹은 요즘 일단의 학생들이 그러듯이 집단적으로 말입니다. 안 그런가요?
문: 촛불이 달성하고자 한 것이 모두 거품으로 돌아갔다는 의미입니다. 미국소 수입도, 대운하도, 교육민영화도 착착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까?
답: 촛불을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운동 정도로 축소한다면 그런 평가가 가능하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투쟁은 투쟁이 내거는 요구나 슬로건 이상을 함축합니다. 권력에 대한 항의, 존엄의 선언,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대한 단언... 실제로 역사의 모든 투쟁들에서 객관적 요구들이 쟁취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설명 쟁취되는 경우에도 쉽게 회수됩니다. 그렇게 객관적 요구들이 쟁취되지 않는 과정이 반복되는데도 혁명들, 반란들, 투쟁들이 계속되는 것은 바로 그 객관적 요구들 이상을 혁명들이 함축하고 바로 그 지점에서 승리가 계속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문: 패배하는데 승리한다구요?
답: 그렇습니다. 맑스도 이미 말한 바 있지만 노동자들의 투쟁들에는 늘 패배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습니다. 하지만 그 투쟁들이 활력의, 제헌권력의 실재성을 단언하고 투쟁에 참여하는 특이성들의 협력의 필요성을 가르치고 또 그것을 달성하게 하는 한에서 모든 투쟁들은 승리하는 것입니다.
문: 너무 낙관적으로 사태를 평가하시는군요. 촛불이 패배하고 나서 개개인들은 더욱 치열한 경쟁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답: 개개인들의 수준에서 사태를 보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투쟁, 반란, 봉기, 혁명의 과정 밖에서 개개인들은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도록 내몰리니까요. 그렇지만 경쟁은 항상 제한적이며 근본적이지도 않습니다. 자본은 다중의 경쟁을 자신의 계급투쟁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할 수 있지만 그것을 착취할 수는 없습니다. 즉 경쟁하기만 하는 노동자들은 자본에게 가치있는(즉 잉여가치를 가져다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본은 어떤 형태로건 노동하는 사람들이 협력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자본이 착취하는 것은 노동하는 사람들 사이의 협력이지 경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생께서 경쟁을 중심으로 개인들의 관계를 바라볼 때 자본관계 속에서조차 필연적으로 강제되는 이 협력의 관계를 놓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근본적인 것은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라는 점에 선생께서 갖고 있는 시각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문: 자본 속의 협력을 과대평가하시는 군요. 그것은 자본을 위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속에서 노동자들은 노예임을 면치 못합니다.
답: 그렇습니다. 자본관계 속에서 노동자는 노예입니다. 하지만 투쟁과 반란과 혁명에 나서게 되는 것은 노예인 바로 그 노동자이고 그 노동자가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라 인간임을, 자유인임을 선언하면서 스스로 변형되는 순간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바로 자본관계 속에서 발전되어온 사람들 사이의 협력을 바탕으로 합니다. 혁명의 힘과 의미는 바로 이 변형을 실재화하는 데 있습니다. 정체성이 파열되어 특이성으로 되며 가치생산적 협력이 공통체생산적 협력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문: 지식인인 선생께서 혁명에 아무리 그러한 의미부여를 해봐야 실제의 다중은 맑스도 네그리도 알지 못하며, 얻을 것이 없으면 물러나고, 의식 속에서는 자유주의나 민족주의에 가까운 이데올로기를 반복할 뿐입니다.
답: 지식인이라는 이름을 사양하고 싶어지는군요. 선생께서 다중과 분리된 위치에서 지성작업을 하는 사람을 부르기 위해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지식인의 위치에서라면 혁명은 관조될 수는 있지만 사유될 수는 없고 해석될 수는 있지만 실천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입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생각에 따르면 다중은 모두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디자이너나 의사, 간호사가 지식인이듯이, 한 사람의 농부도 지금은 토양, 천문, 화학, 생태 등에 관한 박물학적 지식인이지 않으면 안되도록 강제되고 있고 그 경향은 점점 강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 그렇다고 촛불의 다중이 맑스나 네그리의 다중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답: 촛불의 다중이 맑스나 네그리를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나 자신이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촛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점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떤 지휘부도 없이 봉기적 행동을 훌륭하게 조직해 냈다는 점입니다.
문: 자유주의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한계 속에서겠지요.
답: 아닙니다. 자유주의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넘어서입니다. 리얼리즘에서 방법이 세계관을 넘어서는 힘을 갖듯이, 다중의 봉기적 행동은 다중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가졌던 세계관들을 넘어서는 힘을 갖습니다. 봉기의 생명력은 변형, 변이에 있기 때문에 설명 개개인들이 자유주의나 민족주의를 갖고 있었더라도 봉기행동의 전진은 그 세계관의 틀을 넘어서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중은 하나의 이념 형태로서의 일관된 세계관으로 통일된 집단을 지칭하기 위해 고안된 이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정 속에서 혼종되고 변이하며 이 다양성과 이질성들이 서로 공통평면에서 움직이게 되는 공통화의 특질을 파악하기 위해 발명된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제의 '그/녀'가 오늘도 바로 어제의 '그/녀'라고 생각해야 될 아무런 근거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불안정, 변이, 유동, 유연은 우리 삶의 중요한 요소로 되었고 다중의 제도화는 바로 이 변이성의 제도화 이외의 다른 것으로 나타날 수 없습니다.
문: 그런 '넘어섬'의 능력이 있었다면 촛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없지 않았을까요?
답: 처음 문제로 돌아왔군요. 촛불이 사라졌다고 보는 것은 선생의 눈입니다. 인간이 보지 못하는 밤에 부엉이는 100배 이상되는 야간시력으로 사물을 분간합니다. 더 깜깜해지게 되면 부엉이는 시각이 아니라 청각으로 대상과 자신의 관계를 지각합니다. 사라졌다는 것은 선생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 그것이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다중의 형성운동을 지각하기 위해 더 높은 시력, 그리고 다른 감각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다중의 자기형성적 여정은 지금 2008년 거리운동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것은 금융위기와 경제위기 속에,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두려움 속에(이대로 가다간 정권 잃는다), 야당들의 행보 속에, 공무원노조의 통합움직임 속에, 용산의 끈질긴 저항 속에, 새로운 결집의 기회를 기다리는 인내심 속에, 2008년이 무엇이었던가를 성찰하는 토론 속에 ..... 흩어져 있습니다.
문: 정말 선생께서는 혁명이 가능하다고 보며 그것을 진정으로 꿈꾸는 것입니까?
답: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전제위에서 나오는 질문인 것 같은데요.
문: 그렇습니다. 나는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답: 그랬군요. 나는 혁명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도 늘 전개되고 있으며 나 자신이 그 속에 참여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모든 역사적 혁명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이는데도 혁명이 중단되지 않는다는 것은 혁명의 불가능성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혁명이 영원하다는 것, 그것은 옮은가 그른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의 담론적 심판과 해석을 넘어서 혁명 그 자체의 존재론적 실재성을 웅변하는 사태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문: 생각의 차이가 분명하군요.
답: 생각의 차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능의 차이입니다.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주권의 도구로서 기능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햐면 주권권력이야말로 혁명의 한계와 그 불가능성을 웅변하는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역으로 혁명은 주권권력의 한계(그것은 지금까지의 부단한 주권 위기와 재구성 과정으로 나타납니다)를 구성하는 잠재력의 현상학 그 자체입니다.
[워킹 푸어]의 지식전략
Posted at 2009/11/23 19:48// Posted in 쓰기(skribi)/사회운동_S그런데 이 책이 빠뜨리고 있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빈자, 가난한 사람들이 저항할 수 있고 혁명할 수 있고 세계를 새롭게 주조할 수 있다는 사실이며 늘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철저히 감추고 있는 점은 이 책의 가장 큰 악덕이다. 그래서 이 책은 문제의 해결을 그들 자신과 그들 내부로부터 구하기보다 가난하지 않지만 깨어있는 자들의 몫으로 돌린다. 양심있는 자들, 지각있는 자들의 능력과 의지를 강조한다. 시혜적 관점이 10장 이후에 서술되는 대안론을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과 태도는 빈자에 관해 많은 것을 밝히지만 그들이 가진 최후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능력을, 즉 그들의 주체성을 빼앗는 것과 같다. 요컨대 자본이 가난한 사람들의 노동능력을 착취한 후, 지식(의 권위)이 끝으로 그들의 존엄함을 빼앗는 것이다.
그래도 지도가 필요하지 않아요?
Posted at 2009/11/23 16:51// Posted in 쓰기(skribi)/사회운동_S하지만 그것이 정말 좋은 것일가? 물류가 잘 통하면 사람 살기가 좋아지는가? 조용했던 마을이 시끄러워지고 동물들은 갈길을 잃고 차에 치어 죽으며 죽마고우들은 흩어진다. 땅값이 오르면 좋아지는가? 몇몇 사람에게는 분명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땅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즉각 고통이 주어진다. 송곳 꽂을 땅조차 없어지고 그래서 삶은 벼랑 위에 얹히게 되기 때문이다. 사업하기 좋아지는 것이 살기 좋아지는 것인가? 그렇게 되면 고용되는 사람, 혹은 고용조차 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살아야 하거나 생존의 위협을 받으면 살아야 한다. 지도란 특정한 목적을 부각시키는 방법이다. 그 목적에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잘 살게 되지만 그 목적은 결국 다른 삶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일본의 한 사과재배 농민은 아내가 농약과민증에 걸리자 더 이상 농약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농약 없이 사과를 재배해 보려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였다. 수년간의 실패를 견디다 못해 자살하러 산을 올라가 눕는다. 그가 드러누운 곳은 풀밭 위. 문득 풀이 열쇠라는 생각을 떠올린다. 그는 유기농법을 시도하면서도 화학농법을 사용하는 농부들처럼 꼬박꼬박 풀을 베었던 것. 풀을 베지 말자, 자연은 풀을 베지 않고 이 무성한 나무들을 자라게 한다. 풀을 베지 않고 사과를 재배하기 시작한 지 몇 년만에 드디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열린다. 농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사과나무를 토닥거리며 잘 자라다오라고 격려하고 그들이 잘 자랄 수 있는 자연적 환경을 조성해 주었을 뿐이다. 사과는 무성하고 달게 열렸다. 이 사과는 오래 두어도 썩지 않고 마를 뿐이었다. 나무는 병에 걸린 나뭇잎을 스스로 떨어뜨렸고 병걸린 사과는 스스로 치유를 했다. 풀이 쌓여 썩은 땅은 풍부한 미생물로 옥토가 되었고 사과나무 뿌리는 화학농업을 사용하는 사과나무보다 훨씬 깊은 뿌리를 내렸다.(이것은 SBS 스페셜 <1생명의 선택>에서 2009년 11월 22일에 방송한 내용의 일부이다.)
농부는 가르치는 사람(지도자)에서 보살피는 사람(간호원)으로 변했다. 그것이 기적의 사과를 만든 비밀이다. 지도는 즉각적 효과를 가져오지만 수많은 요인들의 복합적 상호작용을 돌보지는 못한다. 지도는 목적의식적이지만 편향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지도가 필요하지 않아요? 뚜렷한 단기적 목표(이윤, 과실)을 맺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 답은 예스이다. 하지만 삶과정 그 자체를 즐기려는 사람에게 그 답은 노이다. 자기제작력, 자기창조력, 자기치유력은 삶과정 그 자체의 내적 속성이다. 이 힘은 억눌려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힘이 어떤 것인지 가늠조차 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례를 들기가 힘들다. 하지만 그 힘은 분명히 실재한다. 지성은 지도능력으로 되기보다 돌봄능력으로 됨으로써 이 자기제작적 자기창조적 자기치유적 자기확장적 능력의 내적 기능으로 될 수 있다. 지도자 농부보다 간호사 농부가 미래 삶에 더 큰 비전을 줄 수 있다.

- 안내링크: http://www.nemopan.com/tv_today/2399529 [Back]
텔레비전신(神)
Posted at 2009/11/22 19:13// Posted in 쓰기(skribi)/사회운동_S모든 대화는 중지되고 오직 텔레비전과의 교감만이 있다. 텔레비전이 느끼게 하고 생각하게 한다. 사건은 현실공간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에서만 전개된다. 텔레비전만이 진정하고 변치 않는 친구이다. 슬픔, 위안, 즐거움의 현실적 장소.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눈을 벌리고 있기만 해도 귀를 열어 놓고 있기만 해도 모든 것을 공급하는 텔레비전.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가없는 사랑을 베푸는 우리들의 하나님 텔레비전. 텔레비전, 아니면 죽음을 달라!
생산과 소비의 밀착 혹은 압축의 정치적 효과
Posted at 2009/11/18 10:21// Posted in 쓰기(skribi)/사회운동_S이 상황에서 소비는 직접적으로 생산의 계기이다. 강의에서의 질문처럼. 소비운동이 생산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더 강하게 띠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소비를 중심으로 한 운동들, 즉 소비자 운동들이 생산의 문제를 직접 자신의 운동으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다.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은 주로 먹을거리를 취급하기 때문에 이 문제맥락에서 다소 멀리 있지만 그럼에도 소비에서 시작하여 생산으로 나아갈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언론은 비물질적노동의 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신문이나 텔레비전 같은 물화된 상품을 중심에 놓기 때문에 과거의 물질노동과 식별하기 어렵게 된다. 언론은 인간들 사이의 소통의 문제이고 소통활동 그 자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운동의 양상은 다를 수 있다. 오늘날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언론소비자운동이 조중동에 대한 비판과 견제라는 네가티브 전술을 넘어서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다중의 운동으로, 직접적인 언론생산자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방법은 무엇일까?
예술인류학에 대한 세 가지 질문에 대한 응답
Posted at 2009/11/11 00:44// Posted in 쓰기(skribi)/사회운동_S
예술인류학에 대한 세 가지 질문에 대한 응답
1. 관계미학이 근거하는 해후의 유물론은 우연성을 중요한 미학적 요소로 끌어올린다. 그래서 그것은 다양한 것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형식의 탄생을 미학적 방법으로 삼는다. 백남준은 이 점에서 관계미학의 연장선상에서 작업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백남준은 단순한 우연을 넘어 좀더 의식적으로 이질적인 것들의 공통성과 연결성을 추구하고 또 시학적으로 실현하며 입증하려 한다는 점에서 관계미학을 더 전진시킨다. 소리와 이미지, 전기와 자기, 동양과 서양, 삶과 죽음, 화음과 잡음 등의 경계를 허물면서 그것들의 공통평면을 드러내는 일에 백남준은 의식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비디오아트와 위성아트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장치였다. 이런 의미에서 백남준은 우주만물을 다중(multitudes)으로서 이해하고 또 제시하려한 예술가이다. 오늘날 이러한 예술행위는 특정한 예술가에 의해서도 물론 시도되지만 전통적 유형의 예술가에 속한다고 보기 어려운 집단적 예술주체들에 의해 훨씬 복잡한 수준에서 수행되고 있다. 오늘날 생산과 운동과 혁명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예술적이며 다중적이다. 오늘날 우리는 제도예술을 넘는 생산적 집단예술, (사회)운동적 집단예술을 목격하고 있다. 경제가 예술행위로 구성될 뿐만 아니라 운동이 사람들, 사물들, 기술들을 조직하는 예술행위로 되고 있다. 예컨대 2008년 대도시 서울에서는 최소한 수개월에 걸쳐 수백만이 참가한 촛불집회가 상연되었다. 하나의 거대한 집단적 퍼포먼스로서 이 사건에 다양한 예술적 장치들이 동원되었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개개인들이 분명한 예술적 행위주체로 참가했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예술적 사실로, 새로운 예술인류학적 사례로 간주될 수 있다. 오늘날 예술인류학이 '제도로서의 예술가'의 예술행위만이 아니라 비제도적 예술행위들, 예술사건들을 분명한 예술적 사건으로 인지할 수 있다면 오늘날 지구적 삶은 예술인류학을 재사유하고 재맥락화하는 데 필요한 풍부한 사례들을 제공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2. 백남준은 1917년 혁명과 1968년 혁명의 차이를 전기에서 전자로의 이행으로 읽고 텔레비전 주사선과 비디오 기술을 미술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것은 소리를 이미지로 바꾸고 다시 이미지를 소리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허물었다. 오늘날 디지털 기술은 소리, 이미지, 텍스트 사이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 백남준의 작업을 더욱 극단적으로 전진시켰다. 오늘날 예술적 실천은 디지털 기술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광범위한 보급과 일반화는 오늘날 예술실천의 사회역사적 조건으로 되었다. 이로 인해 예술주체 역시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UCC(User Created Contents)는 제도 예술가 세계와는 독립적인 방식으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예술행위가 확산되고 있는 분명한 징후이다. UCC는 경제적 가치생산의 중요한 자원일 뿐만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소통의 중요한 방법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은 아직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더 높은 수준의 UCC를 창조하려는 욕구는 팽배해 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자본도 그러한 경향을 저지하기보다 촉진하는 것에 더 큰 이익을 걸고 있다는 것이다. 백남준은 예술가와 비예술가의 경계를 허물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은 특정한 예술가의 요구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요구로 등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지털 기술은 나노 기술, 레이저 기술 등과 결합하면서 백남준 시대에는 생각하기 어려웠던 상상적 세계를 현실화하고 있다. (최근 내가 본 작품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레이저를 쏘아 혈관들의 도관(導管)적 형상을 카메라에 잡아 삶의 도관성을 보여주려한 한 일본 작가의 사진작품이었다.) 새로운 기술과 존재를 예술적인 것으로 전용하기 위한 노력은 가장 오래된 기술들이나 존재를 현대에 되살리려는 노력만큼이나 중요하다. 이것은 백남준이 수행했던 당대의 예술실천을 우리 시대에 계승하는 일이기도 하다.
3. 오늘날 노동은 삶(주체성)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활동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의 노동은 그 자체로 점점 시학(poiesis)에 접근하고 있다. 예술 역시 삶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세계를 재생산하는 활동으로 바뀌면서 예술과 노동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인간중심적인 전통적인 인문학이나 자연을 대상화하는 과학은 삶과 노동과 예술의 이 융합을 설명해 낼 수 없다. 삶과 예술의 융합이라는 상황은 자연과 사회, 인간과 동물, 생물과 기계의 경계를 넘어설 것을 요구하며 우주의 여러 존재들과 사건들 사이의 대칭적 관계성의 시각을 간절히 요구하면서 현대의 수직화된 권력질서와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인류학은 이 대칭성의 요구를 분명하게 의식하면서 고대와 근대, 동과 서, 음과 양, 천과 지와 인, 여와 남, 권력자와 백성 등의 이분화된 세계를 극복하려 한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며 인문학과 과학의 범주를 넘어설 잠재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예술인류학은 구조주의의 틀을 과감히 벗어버리지 않고 그것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관계성과 대칭성에 대한 의식이 역동성과 주체성을 억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새로운 것의 탄생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기존의 틀의 재생으로 귀착되는 것을 허용하곤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인류학은 그것의 열대적 기원성(전근대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성격)을 아직 탈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존재의 운동이 그 자체의 자기 생산을 통한 새로운 전체의 열림으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기존의 구조적 전체 속에서의 변형으로만 귀착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삶과 예술의 하이브리드라는 예술인류학의 올바른 통찰에 정치적 주체성에 대한 고려를 결합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삶예술을 삶정치로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술인류학을 삶예술적 상황에 기초를 둔 예술정치학과 결합해야 한다. 그것은 대칭성과 관계성이 주체성과 힘에 종속됨을 승인하고 주체성의 동학을 분석하는 문제이다. 이럴 때 비로소 예술인류학은 그 자체가 사회적 예술행위와 혁명적 세계변형의 구성적 부분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이상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1. Artistic anthropology intends to produce novel models of
relationality and connectivity. Could – Nam June Paik's legacy as a
form of – artistic anthropology contribute to an artistic discourse
going beyond the framework of relational aesthetics? Who are the
artists in our day developing relevant examples of rethinking and
recontextualizing an artistic anthropology?
2. What could
artistic anthropology mean for a current artistic practice? How could
it relate to medium-specific qualities? Is it a form of artistic
communication defined by a post-medium condition? Or is it a practice
that demands the concept of medium-specificity to change?
3.
What could artistic anthropology - as a form of knowledge production -
mean for the current classification system? Will it challenge the
dominant paradigms of the established humanities and sciences? What
type of new models might this trigger? How can artistic anthropology
contribute to a better and more political understanding of the human
condition? And what could artistic anthropology mean for the concept of
art in general?
Pensu kiel singulara aŭtonoma marksisto, agadu kiel kosmopolitika esperantista homaranisto.
